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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신동욱 앵커의 시선] 채워지지 않은 물컵

등록 2023.03.17 21:54 / 수정 2023.03.17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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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첫 해, 일본 국빈 방문에 앞서 말했습니다. "천황이 방한하실 때, 한국 국민이 따뜻하게 환영할 분위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김 대통령은 '일왕' 대신, 금기였던 호칭 '천황'을 썼습니다. 더구나 일본이 한국 투자금을 회수해 외환위기를 부채질했다며 대일 감정이 극도로 나쁘던 때였지요.

하지만 김 대통령은 "외교가 상대를 살피는 것이라면, 상대 국민이 원하는 대로 호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일왕 만찬에서도 '천황 폐하'라고 부르면서, 과거사는 일절 꺼내지 않았습니다.

김 대통령은 "정치 지도자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갖춰야 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국익을 위해서는 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리를 함께 챙겨야 한다는 얘기지요. 그가 일본에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상인의 현실감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일 관계의 미래를 향한 물 반 컵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과거를 돌아보는 물을 따라 한 컵 가득 채웠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말했습니다. 그렇게 과거를 직시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탄생했습니다.

김 대통령이 일본을 역사의 장으로 이끌어낸 것은, 서생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채워졌던 한일 관계의 물잔이 문재인 정부 때 뒤집어지면서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이 다시 물 반 컵을 먼저 따랐습니다.

강제징용 해법을 내놓으면서 정부는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으로 물컵이 채워질 것" 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손을 내밀어 12년 만에 성사된 한일 정상회담은, 과거보다 미래에 눈길을 뒀습니다.

두 정상도 말했듯 미래를 향한 첫걸음이자 큰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꼬일 대로 꼬인 한일 관계를 풀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과거를 돌아보는 물컵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비롯한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습니다. 징용 기업들을 비롯한 일본 측의 배상 참여도 외면했습니다. 유감스럽고 실망스럽습니다.

다만 일본 측 호응 조치에 대해 "몇 가지 구체적 성과가 있었고, 그 결과를 하나씩 응하고자 한다"며 해결의 여지를 열어뒀습니다. 컵에 물을 찔끔 따르다 만 것이지요.

윤 대통령은 정치적 타격을 각오하면서까지 과감한 징용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몸을 던지는 고육책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과거를 보다 진지하게 돌아보고 정리해, 윤 대통령이 국민을 설득할 근거를 마련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어렵게 물꼬를 튼 미래가 다시 과거에 발목을 잡힐지도 모릅니다.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는 처칠의 명언처럼 말입니다.

3월 17일 앵커의 시선은 '채워지지 않은 물컵'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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