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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동욱 앵커의 시선] 불편함의 재발견

등록 2023.03.28 22:53 / 수정 2023.03.28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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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LP 레코드 한 장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립니다. 가장자리 첫 곡에 조심스럽게 바늘을 놓습니다. 1962년 빌보드 1위, 코니 프랜시스의 명곡이 흐릅니다.

가난했지만 따스했던 1960년대 산골 초등학교. 열일곱 살 늦깎이 여학생과 스물한 살 초임 교사가 제각기 하는 짝사랑이 LP로 시작해 LP로 맺습니다. 소녀는, 선생님이 나누는 LP 이야기를 엿듣고 잠 못 이룹니다. 

"엘프" "엘프?"
"선생님 엘프가 뭐예요?"

1960~80년대에 사춘기를 보낸 장노년들은 '빽판'의 추억 하나쯤 품고 계실 겁니다. LP판 가운데 동그란 라벨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하얀 '백판(白板)'이 된소리로 바뀌었지요. 라이선스 계약은커녕 버젓이 불법 복제해 팔리던 해적 음반입니다.

값싼 빽판은, 팝송 특히 '보헤미안 랩소디' 같은 금지곡을 접하고 즐기는 숨길이었습니다. 시인은 빽판을 구하러 드나들던 세운상가의 추억을 노래합니다.

"비틀스 해적판을 찾아서 비틀거리며,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나 끝끝내 목이 쉰 야외 전축처럼…" 

LP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지도 10년 가까이 됐습니다. 사방 벽을 LP로 채운 카페가 여기저기 들어섰습니다. 이런 곡도 있을까 긴가민가하며 신청곡을 적어내면 신통하게도 찾아내 틀어줍니다.

이 카페는 좌석마다 턴테이블과 헤드셋을 갖췄습니다. 저마다 자기 불판에 고기를 구워먹듯, LP를 골라와 즐깁니다. 남이 신청한 곡을 듣는 게 아니라, 방해받지도 방해하지도 않으며 자유롭게 누리는 게 MZ세대 취향에 맞아떨어집니다.

실제로 LP 구매자 중에 2030이 3분의 1을 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아예 LP가 35년 만에 CD 판매량을 추월했지요.

LP 애호가들은 "CD에서 맛볼 수 없는 깊은 음감이 있다"고 말합니다. CD는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바꾸면서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 너머 음역을 잘라버립니다. 그래서 소리가 깔끔하지만 비인간적이고 차갑다고 하지요.

LP는 긁히거나 깨지기 쉽고, 자주 닦아줘야 합니다. 낡으면 찍찍거립니다. 하지만 거기엔 흘러간 세월의 먼지가 앉아 있습니다.

그렇듯 LP는 활판인쇄 책처럼 따스한 촉감으로 교감합니다. 그때그때 사서 듣는 스트리밍은 소비하는 것이지만, LP는 소장하는 것이지요.

디지털의 냉기가 세상을 뒤덮을수록, 아날로그에 깃든 체온과 감성, 그 아련한 너그러움이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갇힌 삶들을 한순간 자유인으로 날아오르게 했던 천상의 목소리, 모차르트의 이중창처럼 말이지요.

3월 28일 앵커의 시선은 '불편함의 재발견'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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