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보내기
  • URL복사
생활문화

[박소영의 닮고 싶은 책] 급진적으로, 내 목소리로 존재하기

등록 2023.10.24 13:36 / 수정 2023.10.24 13:51

  •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보내기
  • URL복사

/가망서사 제공

약 1년 전쯤 영화관에서 동생과 함께 '애프터 양'을 봤다. 안드로이드 인간 '양'이 어느 날 작동을 멈추면서 그와 삶을 공유하던 사람들이 슬픔에 잠기는 이야기였다. 가슴 따뜻해지는 영화였지만 묘하게 뒤틀리는 구석이 있었다. 극장을 나서면서 동생이 내게 말했다.

"글쎄, 안드로이드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여기에 너무 많은 죽음들이 있지 않나. 동물들은 매일 같이 학살당하고 어딘가에선 아이들이 굶어 죽어. 그런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안드로이드 인간을 만들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이 나한테는 좀 기만적으로 느껴져."

'급진적으로 존재하기'(가망서사)에 실린 질리언 와이즈의 글을 읽으며 저 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이 문장 때문이었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이 "사이보그 개념이 전제하는 장애인이라는 참조점을 지워버리면서 사이보그 정체성을 사용한다"며 그가 이렇게 쓴 것이다.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고.

그것은 동물들의 이야기 없이 성립할 수 없는 숱한 논의들에서 그들의 존재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하고 우리가 매일 같이 하는 말이었다.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아. 기대도 안 했어."

질리언 와이즈는 '평범한 사이보그'라는 짧은 글에서 스스로를 사이보그로 정체화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보여준다. 매일 밤 인공다리를 떼어내며 다리가 없이도 스스로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지 자문하는 와이즈에게, 픽션의 문제로서의 사이보그 이야기는 한가하게 들린다. 그에게 사이보그로 사는 일은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급진적으로 존재하기'는 미국 장애인권 활동가이자 중증장애인인 앨리스 웡이 미 장애인법 제정 30주년을 맞아 엮은 책으로, 장애 당사자들의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장애 유형도, 인종이나 계급도 모두 다른 저자들이 스스로의 삶을 열어 보이는데, 별도의 수식 없이도 빛나는 글들이 가득하다.

가령 해리엇 맥브라이드 존슨은 '장애가 있는 영아를 살해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나'를 두고 피터 싱어와 벌인 그 유명한 토론에 대해, 스카이 쿠바컵은 어떤 신체 정체성을 가진 사람도 입을 수 있는 의류 브랜드를 탄생시킨 경험에 대해 들려준다.

"내 인생의 드라마는 나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세상 속에서 쓰였다. 그것이 이 드라마만의 특징이다. 나의 투쟁은 나를 대하는 세상을 향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나를 향한 것, 협상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해리엇 맥브라이드 존슨 '말로 다 할 수 없는 대화')

/휴머니스트 제공

'너의 목소리를 보여 줘 1'(휴머니스트)은 농인 작가인 앤 클레어 르조트가 19세기 마서스비니어드섬의 농공동체에 영감 받아 쓴 역사소설이다.

1800년대 초반 마서스비니어드섬에선 청각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가 수어를 쓸 줄 알았다. 그들은 입 못지않게 손을 써서 말했고 눈으로 소통했다.

무언가를 생각할 때 "형상과 감정의 흐름"을 떠올린다며 그것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음악을 닮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주인공 메리의 태도는 농인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사유하는지 잘 보여준다. 책 속 메리의 세상은 고요하지만 동시에 요란하며 시끌벅적한 곳이기도 하다.

"적막. 많은 청인, 특히 농인에 대해 잘 모르는 청인들은 우리가 적막 속에 산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틀렸다. 내 안에 활력과 즐거움이 가득하고 앞날에 대한 기대로 흥분한 순간은 결코 적막에 싸여 있지 않다. 나는 기분이 좋은 때면 벌처럼 윙윙거린다." (P.59)

작가 앤 클레어 르조트는 "농인에게도 자랑스러운 문화와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장애 경험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어린이·청소년 책에 미국도서관협회가 수여하는 '슈나이더 패밀리 도서상'을 받았다.

Copyrights ⓒ TV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