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욱 앵커의 시선] 비정규직 제로 선언의 역습
신동욱 기자 | 2019.07.04 21:46
어느 소설가가 중학교 은사를 37년 만에 모시고 식사를 대접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밥 절반을 덜어놓고 반 그릇만 듭니다. 건강 때문에 소식(小食)을 하시는지 여쭸더니 "너희 가르칠 때부터 평생 습관" 이라고 합니다.
어린 제자들이 빈 도시락만 들고 다니며 굶는 것을 보고 결심한 일이라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밥을 일일이 나눠줄 순 없어도 밥그릇 절반만한 마음이 너희 곁에 함께하기를 바랐다…" 소설가 이청준이 실제 은사를 떠올리며 쓴 '선생님의 밥그릇'입니다.
그렇듯 끼니조차 어려웠던 시절 도시락을 슬픈 추억으로 간직하는 분이 많을 겁니다. 저희 때까지만 해도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나가 수돗물을 마시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주 오랜만에 도시락에 얽힌 이야기를 동료 여직원한테서 들었습니다. 아침 출근길 동네 엄마를 따라 등교하는 아이가 울고 있더랍니다. 다른 아이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갖고 가는데 자기는 빈손인 게 서러웠던 겁니다. 출근 준비에 바빠 도시락을 못 챙겨준 그 엄마는 미안한 마음에 쩔쩔 맸다고 합니다. 급식 파업 바람에 이렇게 웃지 못할 도시락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엔 고속도로 요금 수납원들이 경부 톨게이트를 막으면서 큰 혼잡이 빚어졌습니다. 파업과 집단행동에 나선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요구 자체는 매우 단순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이틀 뒤 맨 처음 했던 이른바 1호 지시를 실행하라는 겁니다.
"우선 공공부문에서 임기 내에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 특히 국가 정책에서 '제로'같이 완벽한 현실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80% 넘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이 정년을 보장받았지만 공무원에 버금가는 신분-급여와 직접 고용 요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당장 정부 예산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정치인, 특히 대통령의 말은 대단히 신중해야 합니다. 이번 일 역시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는 게 불과 2년 여년 만에 확인된 셈이지요. 근로자들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약속을 했으니 지키라고 요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이들의 급식이 중단되고 고속도로가 막히고, 또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 불안한 상황은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7월 4일 앵커의 시선은 '비정규직 제로 선언의 역습'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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