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Talk] "저는 임차인입니다" 윤희숙의 명연설…근데 통합당 의원님들 어디 계셨어요?
김수홍 기자 | 2020.07.31 13:20
기대는 감탄으로 바뀌었습니다. 29일 민주당은 법사위 상정 하루만에 가결된 임대차법을 본회의에서 50분만에 처리한 직후였습니다. 미래통합당 윤희숙 의원이 자유발언을 위해 단상에 올랐습니다.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과 경제사에 기억될 2020년 7월 29일, 초선 의원 윤희숙의 4분 19초짜리 연설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저는 임차인입니다. 제가 지난 5월 이사했는데 이사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집주인이 2년 있다가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달고 살고 있습니다"
저도 임차인입니다. 지난해 11월 이사했는데 윤 의원과 같은 생각을 달고 살고 있습니다.
그의 연설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오늘 표결된 법안을 보면서 제가 기분이 좋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에게 든 생각은 4년 있다가 꼼짝없이 월세로 들어가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윤 의원과 저 같은 많은 임차인들이 가졌을 우려를 가장 정확히, 그리고 솔직하고 담담하게 풀어나갔습니다. 이어서 그는 경제학자로서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었을) 시장 원리를 다시 한 번 주지시켰습니다.
"임대 시장은 매우 복잡해서 임대인과 임차인이 서로 상생하면서 유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표정에서 분노가 느껴지기 시작한 건 이 부분부터였습니다.
"집을 세놓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순간 이 시장은 붕괴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팔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전세대란) 이 문제가 나타났을 때 정말 불가항력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첫 본회의 연설의 긴장감에 감정까지 북 받친 탓이겠지요. 경제 전문가로서 해당 법안이 이 나라의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한 걱정이 누구보다 컸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 "레전드다"
윤 의원의 연설을 '레전드(전설)'이라고 제목 붙인 유튜브 영상은 조회수가 반나절만에 6만 건을 넘었습니다. 윤 의원의 페이스북에는 '명연설, 속 시원한 연설'이란 댓글이 줄을 이었습니다.
같은 당 박수영 의원은 본인 페이스북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경제학자가 국회의원이 된 뒤 첫 본회의 발언을 한 것"이라며 영상을 공유했고, 황보승희 의원은 "전율이 느껴진다"고 적었습니다.
그의 연설을 두고 '감탄으로 바뀌었다'고 한 건 아래 부분 때문입니다.
"저라면 임대인에게 어떤 인센티브를 주어서 두려워하지 않게 할 것인가, 임대소득만으로 살아가는 고령 임대인에게는 어떻게 배려할 것인가. 그리고 수십억짜리 전세 사는 부자 임차인도 같은 방식으로 보호할 것인가 이러한 점을 점검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의회독재'니 '하명입법'이니 하는 단어는 한 마디도 쓰지 않고, 민주당이 자신에게서 법안 심의 기회를 박탈하지 않았다면 어떤 대안을 제시했을지를 명확히 밝혔습니다.
그의 손은 갈 수록 사시나무 떨 듯 떨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연설은 마무리됩니다.
"이 법을 만드신 분들, 민주당, 축조심의 없이 프로세스를 가져간 민주당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전세 역사와 부동산 정책의 역사와 민생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 "정책의 배신"
경제학자인 윤 의원이 펴낸 책 제목은 '정책의 배신'입니다. 지금보니 이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의미심장합니다.
책소개에는 "잘못된 정책이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다!"며 "국민들이 정책의 함정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도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개혁의 비전과 불평등 심화 추세에 대한 해결책을 담았다"고 돼있습니다.
지난 5월 당선인 시절 한 통합당 초선 의원을 만났을 때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었을 때 '이 책을 읽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재밌다"고 했습니다.
다른 경제학자 출신 의원은 가장 기대되는 초선으로 윤희숙 의원을 꼽기도 했습니다. 앞서 '기대'를 언급한 건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윤 의원을 경제혁신위원장에 임명했습니다.
■ 그런데 통합당 의원님들은요?
초선 의원의 첫 본회의 연설. 그것도 '레전드'라고 불리는 이 연설에 유독 박수 소리가 작았습니다.
한 중진 의원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보셨냐고. 그랬더니 "못 봤다"고 합니다.
상황은 이랬습니다. 통합당은 어제 절차적 문제가 있다며 임대차법 표결에 불참하기로 의원총회에서 정했습니다. 그래서 조수진 의원의 반대토론 발언이 끝난 뒤, 원내대표단과 함께 모두 본회의장을 빠져나간 것이었습니다.
이후 일부 의원들이 다시 본회의장에 들어오긴 했지만, 윤 의원이 바들바들 떨며 여당을 향해 일갈하고 돌아올 때, 그를 박수로 맞아준 통합당 의원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중진 의원에게 "꼭 보셨어야 할 연설이었다"고 했더니 상당히 아쉬워하면서 "초선 의원을 본회의장에 그렇게 혼자 뒀으면 안 된다. 다함께 응원해줬어야 한다"며 "명백한 원내 운영 실수"라고 지적했습니다.
연설문과 영상을 올려둔 윤희숙 의원의 블로그에는 현재 500여개의 응원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리고 윤 의원은 여기에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옳다고 생각한 바를 이야기 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이들 공감해주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윤 의원의 연설은 "수적 열세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한다", "장외투쟁이라도 하자"는 통합당 분위기에 "원내에서 이렇게 싸워야 한다"는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어제 못 보신 통합당 의원님들 영상으로라도 한 번씩 보시기 바랍니다. / 김수홍 기자
<연설 영상과 원문이 수록된 윤희숙 의원의 블로그 링크>
https://blog.naver.com/yhs_2020/22204638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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