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담차담] "한 바퀴 돌고 요정으로 가세"
지정용 기자 | 2023.08.03 09:00
조랑말 신화의 뿌리 ②
생각난 김에 12월 29일 경상남도 경무부에서 영업허가부터 받았다. 최초의 자동차 영업허가다. 노선은 마산~진주, 진주~삼천포였다. 8개월 뒤 '오사카 포드'에서 8인승 무개차(無蓋車) 1대를 들여왔다. 1912년 9월 17일 시운전을 끝내고 사흘 뒤 영업에 돌입했다.
"에가와의 자동차영업은 당분간 1대를 격일로 마산 혹은 진주에서 발차하고, 운전시간은 5시간으로 하여 진주~마산간 요금은 3원80전, 마산~군북(함안)간은 2원, 군북~진주간은 2원2전이요. 특등석은 3할씩 증액하되 2개월 내에는 필히 차를 증차하여 매일 운행한다더라."
70km 구간을 4시간반 만에 주파했다. 8인승이지만 승객은 10명까지 탔다. 낮에는 지붕 없이 달렸다. 밤에는 천막지붕을 치고 가스등을 달았다. 특등석은 운전수 옆이었다. 그나마 먼지를 덜 뒤집어쓰는 자리였다. 도로 주변마을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구경했다. '에가와 승합'은 1913년엔 부산~삼랑진~마산 노선도 허가받았다.
진주에서 마산까지, 쌀 한 가마니였다. 부자들과 돈 잘 버는 일본인 사업가가 아니면 이용하기 어려웠다. 가격 탓에 이용자가 줄면서 회사도 점점 여유가 없어졌다. 에가와가 직접 운전했다.
1917년 6월 마산으로 가던 길이었다. 함안에서 전복사고가 났다. 일제 해군 중장 일행과 기생 배봉악이 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부상을 입었지만 배봉악은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 이 사건으로 에가와는 치료를 받은 뒤 처벌을 받았다. 진주대관(1940)에 따르면 "옥창에서 신음하는 신세가 되었다".
한 달 전인 8월에 대구~경주~포항 승합버스가 생겼다. 일본인 오츠카 긴지로가 영업을 시작했다. 평균 시속 24km로 9시간이 걸렸다. 영업일로는 한 달여 빨랐지만 부정기 노선이었다.
1913년 3월, 이봉래가 일본인 곤도, 오리이와 회사를 차렸다. 20만 원을 공동출자했다. 포드 모델T 2대를 구입하고 임대영업을 시작했다. 한 시간 단위로 임대했다. 우리나라 택시의 시초다.
시간당 5원, 시내를 한 바퀴 도는 '유람'은 3원이었다. 대절자동차(가시키리 구루마)로 불리며 '장안의 돈'을 쓸어담았다. 갑부나 권세가들은 요정 가는 길에 유람을 겸했다. 이듬해 전국 9개의 승합노선까지 허가받았다. 경성~장호원, 경성~춘천 등의 노선이 이때 시작했다.
'오리이자동차상회'는 사업을 확장했다. 10대의 포드를 주문하고 운전수 모집 광고를 냈다. 지원자, 없었다. 당시 일본에도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자동차학원을 세워 직접 운전을 가르치기로 했다. 갈월동의 경성운전수양성소다. 처음에는 응모가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쇠 귀신'이란 소문이 퍼진 탓이다.
혜택을 광고했다. "입학금 전액무료, 교육기간 월급 지급, 성적 우수자 곧바로 취직". 겨우 10명을 채웠다. 이것도 9명은 일본인, 1명은 공동출자자 이봉래의 아들 이용문이었다. 운전수는 정비도 했다. 일본에서 포드의 정비교사를 데리고 와 가르쳤다.
제임스 모리스는 1897년 경인선, 1899년 서대문~청량리 전차 기술자였다. 사후관리를 위해 국내에 남았다. 자동차 수요가 늘어난다는 걸 알아챘다. 1915년 서울 정동고개에 자동차판매점을 차렸다. 모리스는 통역를 잘 하던 이명원을 지배인으로 고용했다. 닷지, 오버랜드, 커닝햄 등을 미국에서 수입해 팔았다. 이듬해 샌프란시스코의 정비사인 친구 하워드를 불러들였다. 모리스상회 옆에 정비소를 차렸다. "자동차병을 잘 고치는 서양 명의가 생겼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선인이 경영한 정비공장 1호는 1922년 경성서비스공업사다. 이후 명륜동과 광화문 등에 정비업체들이 들어섰다. 1940년, 북아현동에 있던 아도서비스(Art Service)를 25세 청년이 3500원에 인수했다. 자동차라는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 청년의 이름, 정주영이다.
1913년 유학파 민대식이 자동차 영업에 뛰어들었다. 구한 말 최고 권력을 누린 친일파 민영휘의 둘째 아들이다. 권력은 대단했다. 일본인이 아니면 받기 힘든 허가를 '조선인 단독'으로 얻었다.
차종은 포드 모델T 승합형이었다. 부자들은 자동차 타는 멋을 부리려고 돈을 썼다.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였다. 당시 기사는 손님을 '자동차 임금'으로 표현했다.
"자동차 임금은 10리(3.93km)에 30전식을 내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차대의 수가 부족한 까닭에 자동차를 타려면 적어도 1주일 전부터 차표를 사두고 예약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 : 위키백과, 위키피디아커먼즈, 나무위키, 진주대관(1940), 매일신보, 동아일보, 현대기아차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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