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담차담] 이게 경고야, 감탄이야?

지정용 기자 | 2023.08.17 09:00

조랑말 신화의 뿌리 ④
"각하,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자동차가 전시돼 대단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가? 누가 만들었는가?"

 


산업기반조차 없는데 자동차라니. 1955년 10월 박람회 대통령상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이름은 '시발(始發)'. 욕 아니다. '자동차 생산의 시작'이라는 의미였다. 상표는 한글 'ㅅㅣ-ㅂㅏㄹ'로 표기했다.

 


1937년 최씨 삼형제가 정비공장을 차렸다. 무성·혜성·순성씨였다. 해방 후 주둔했던 미군은 떠나면서 자동차를 불하했다. '윌리스 MB'와 'GMC 트럭'이었다. 삼형제는 '국제차량제작'을 세우고 차량 재활용, '재생차' 사업으로 진출했다.

 


6.25 전쟁 후, 모든 게 태부족이었지만 드럼통은 많았다. 전쟁은 기름 소모전이기도 했다. 삼형제는 재생차 노하우를 살려 자동차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드럼통을 차체에 일부 활용했다. 필요한 부분은 '두드려 폈다'.

 

 
미군이 두고간 '윌리스 MB' 엔진을 해체했다. 엔지니어 김영삼이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했다. '동일한 성능을 얻기 위해 내부 부품을 모두 뜯어내 분석'했다. 쓸 만한 부품은 모아 재조립했다. 망가진 부품은 '거푸집 주조 방식'으로 똑같이 만들었다.

 


복제품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단복제를 알게 된 본사에서 찾아왔다. 윌리스를 인수한 카이저프레이저의 엔지니어는 제작 과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고하는 말 속에 경이로움이 묻어나왔다. "당신들! 정말 대단하군요. 하지만 이런 짓은 당장 그만둬야 합니다." 복제를 문제삼은 적은 없다.

 

 
수제작이어서 한 대 생산에 넉 달이 걸렸다. 사무실과 공장은 을지로2가에 있었다. 미군이 버린 버스가 사무실이었다. 공장은 비를 피하면 그만이었다. 천막을 쳤다.

 

 
복제가 순정과 같을 순 없었다. '포니를 만든 별난 한국인들'의 저자 강명한은 대학 시절 삼성공업사에서 실습했다. 엔진블록을 만드는데 힘을 보탰다. 제작에 일조한 뿌듯함에 시발택시 기사에게 엔진이 어떤지 묻곤 했다. 기사들은 "두어 달이 지나면 (엔진에)힘이 빠진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박람회에 앞선 1955년 8월의 출시가는 8만 환이었다. 보릿고개 시절 쌀 90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수상 이후 택시회사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폭등했다. 30만 환이어도 구할 수가 없었다. 대량 생산을 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부유층의 주문도 쇄도했다. 한 대 가격은 90만 환까지 올랐다. 선금으로 받은 계약금만 1억 환이 넘었다. 공장을 확장했다.

 


전조등과 타이어, 차체까지 하나씩 국산화했다. 1956년 엔진 일부도 자체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1958년 차체와 엔진의 국산화율이 56%라는 자료를 정부에 제출했다.

 


파생형으로 1957년 세단형 9인승을 제작했다. 버스와 픽업 트럭도 만들었다. 픽업은 시발자동차의 부품 운반용으로 2대를 생산했다.

 


라디오 광고를 했다. 로고송을 흥얼거리다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혼나기도 했다. 욕 하지 말라고.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자동차를 타고 삼천리를 달리자~ 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자동차를 타고 종로 거리를 달리자~"

 

 
1937년 2월, 일제는 부평에 공장을 지었다. 인천북항이 가까웠다. 중·일전쟁을 작심하고 군용차량 생산기지를 만든 것이다. 이름은 '국산자동차'로 포장했다.

일제는 패망했고, 시설은 남았다. 자연스레 국영기업이 됐지만 생산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인력도 자본도 없었다. 방치되다가 1954년 조용히 청산했다.

 


공장을 다시 가동한 건 1962년이다. 재일교포 박노정이 닛산의 '블루버드' 부품을 들여와 조립했다. 모델명은 '새나라'.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있었다. 디자인이나 성능, 공급량에서 압도했다. '시발'은 주문이 없어지며 1963년 5월 문을 닫았다. '망치로 두드려 펴' 2235대를 생산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나라는 1962년 11월 생산을 시작했다. 인기몰이를 했다. 이듬해 5월까지 7개월도 안 되는 기간에 2700여 대를 생산했다. 그러다 박노정은 갑자기 국내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잠적했다. '먹튀'였는데, 행방을 끝까지 찾지 못했다.

 


공장은 어떻게 됐을까. 신진자동차, 새한자동차를 거쳐 대우자동차로 넘어갔다. 이 부평2공장에서 대우는 '로얄·프린스 시리즈'를 생산했다.

 

 
시발의 필리핀 버전이 지프니(Jeepney)다. Jeep와 Pony의 합성어로, '윌리스 MB'를 개조한 버스다. 여러 대를 운영하느 업체도 있지만 개인도 운영한다. 여전히 현역이다.

 

 
2차 세계대전 초기 미군은 '다목적 전술차량'을 원했다. 세 모델이 요구를 충족시켰다. 윌리스-오버랜드의 MA, 밴텀의 40BRC, 포드의 GP. 각각 납품받다가 1941년 장점을 합친 모델 '윌리스 MB'를 개발했다. 윌리스가 생산했다. 기동성이 뛰어났지만, 무게중심이 너무 높아 전복사고가 잦았다. 1980년 들어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서 '험비'로 교체했다.

 

 
'지프'는 포드의 납품 모델인 'GP'를 부르다 고유명사처럼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지금도 차체가 높은 차를 '지프'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대개 악센트를 강하게 한다. '찦차'다.


(사진 : 위키백과, 위키피디아커먼즈, 나무위키, Google, 경향신문, 삼성화재교통박물관,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대한뉴스, 국가기록원, 한국자동차산업협회)

 



뉴스제보
이메일(tvchosun@chosun.com)
카카오톡(TV조선제보)
전화(1661-0190)

Copyrights ⓒ TV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