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욱 앵커의 시선] 강서에서 길을 묻다

신동욱 기자 | 2023.10.12 21:52

영국 풍자 소설가 토머스 피콕은 괴팍했습니다. 남의 말에 귀를 열지 않는 독선과 아집으로 살았지요. 그는 집에 불이 나자 책을 구하겠다며 서재에서 버텼습니다. 끌어내려는 사람들에게 외쳤죠.

"불사의 신들에게 맹세코,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불 속에 쓰러진 그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얼마 안 가 후유증으로 숨졌습니다.

'고집'이란 어리석지 않다고 우기는 것' 입니다. 장자 말씀이지요. 능력은 부족하면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 '오기(傲氣)'를 속되게 일러 '깡'이라고 합니다.

시인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천심이거늘 깡 하나로 되겠는가. 비웃음이 모여 검은 구름 만들면, 비 뿌리지 않겠는가. 무슨 덩어리로 폭발할지 알겠는가.'

그렇게 망한 게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 때 민주당 이었습니다. '중대한 잘못으로 열리는 재보궐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당헌까지 바꿔 꼼수 공천을 했다가 참패했지요. 대선과 지방선거까지 내리 패배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국민의힘이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당한 참패를 보며 '전철(前轍)을 밟는다'는 말을 떠올립니다. 국민의힘 역시 '보궐선거 원인을 제공하면 공천하지 않는다'는 당규가 있지만 뭉갰습니다.

국민의힘 구청장이 대법원 판결로 면직돼 치르는 선거에 후보를 냈습니다. 그것도 원인 제공 당사자인 김태우 전 구청장을 그대로 공천했습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법원 판결 석 달 만에 그를 사면해 출마의 길을 열어줬습니다. 대통령실과 집권당이 손발을 맞춰 정도(正道)를 외면한 결과가, 17퍼센트 차, 두 자릿수 패배입니다.

이렇게 한데는 나름대로 할 말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규정을 만든다는 건 어떤 억울함이 있더라도 지키겠다는 자기 약속인 것입니다. 억울하다고 스스로 만든 규정을 함부로 뭉갤 때 국민이 어떻게 바라 볼지 다시 한번 교훈을 남긴 셈이지요. 

강서구는 국회의원 세 명 모두 민주당인 전통적인 야당 강세지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난해 지방선거 때, 그러니까 김태우 전 구청장이 당선될 때 2.6퍼센트 차로 승리했습니다. 그 사이 20퍼센트 포인트 가까운 민심이 민주당 쪽으로 옮겨간 셈이지요. 부정하고 싶겠지만 이 성적표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국정전반에 대한 성적표나 다름없습니다.

민심을 물에 비유해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는 순자 말씀 그대로입니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민심을 엄중하게 받아 들인다고 했습니다. 민주당도 그랬지요. 하지만 잠깐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더니 쇄신과 혁신을 게을리하다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유세전이 한창인 지난 며칠 벌어진 일들만 보더라도 어디서부터 잘 못 됐는지는 자명합니다.

당장, 국민들이 다 지켜보는 청문회장을 이탈한 여가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로 방향을 튼 건 당연한 순리 입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독설가 버나드 쇼가 자기 묘비에 새긴 유명한 글이지요. 내년 총선에서 누구에게 이런 묘비명이 붙을지 국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10월 12일 앵커의 시선은 '강서에서 길을 묻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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