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마이바흐(W. Maybach)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다.
로이틀링겐 자선기관에서 '먹고살 수 있는' 엔진 기술을 배웠다.
남달랐다.
이해가 빨랐고, 열정이 넘쳤다.
자선기관 설립자 구스타프 베르너의 눈에 띄었다.
베르너는 마이바흐를 로이틀링겐 공립고등학교에 보냈다.
엔지니어링 수업 외에 물리학과 수학을 추가로 배웠다.
19살 때, 마이바흐는 이미 최고의 '엔진 디자이너'였다.
당시 입사했던 곳이 도이츠.
작업장 관리자는 고트립 다임러였다.
'다임러-벤츠'의 그 다임러, 맞다.
다임러와 마이바흐는 12살 차이가 났지만, 죽이 잘 맞았다.
1872년, 함께 니콜라우스 오토의 회사로 옮겼다.
수석 디자이너였다.
1876년 가솔린 4행정 내연기관으로 특허를 받았다.
하지만 다임러와 오토는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방식의 엔진에 집중할 것인가를 두고 마찰이 잦았다.
1880년 다임러는 오토와 대판 싸우고 회사를 나갔다.
마이바흐도 얼마지나지 않아 '퇴사'에 합류했다.
두 사람은 오토와 함께 '25행정'의 특허 공동등록자였다.
특허값을 현금으로 계산해 오토에게서 일시불로 받았다.
이 돈으로 두 사람은 칸슈타트에서 회사를 차렸다.
DMG(Daimler Motoren Gesellschaft)였다.
초기엔 집이 곧 개발실이었고 공장이었다.
이게 주변의 오해를 샀다.
사람이 있긴 한데, 왕래는 거의 없고.
이상한 소리는 들리고.
"분명히 이상한 위조품을 만드는 것 같다"고 주민들이 신고했다.
경찰이 출동했고, 샅샅이 뒤졌다.
있는 거라고는 엔진과 관련한 부품 뿐.
경찰은 '오인 신고'로 사건을 종결했다고 한다.
1885년.
증발된 가솔린과 공기를 혼합하는, 최초의 기화기 엔진을 개발했다.
1기통, 264cc, 0.5마력으로 최고 16km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자전거에 우선 장착했다.
이게 '라이트바겐(Reitwagen)'이다.
오토바이 역사의 시작이다.
자동차에 적용된 건 1886년 8월이다.
다임러의 부인이 생일 선물로 마차를 받아왔다.
마이바흐는 '말' 대신 5.15마력 가솔린 엔진을 얹고 바퀴를 달았다.
시운전에서 시속 9km에 도달했다.
이보다 7개월 앞선 1886년 1월.
칼 벤츠는 '페이턴트 모터바겐'으로 특허를 등록했다.
벤츠는 7개월 차이로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로 공인받았다.
'자동차 벤츠'의 첫 장거리 운행은 1888년이었다.
아내 베르타 벤츠가 남편 몰래 두 아들을 태우고 친정을 다녀왔다.
만하임에서 포르츠하임까지 왕복 200km에 가까운 여행이었다.
주유소라는 게 없었으니, 중간중간 약국에 들러 가솔린을 샀다.
가죽으로 만든 브레이크가 닳으면 구두 수선점에서 가죽을 얻어 수리했다.
특허 등록은 한 발 늦었지만, DMG 엔진은 빼어났다.
1889년 서적상 뵐퍼트는 1기통 엔진을 가져가 비행선에 달았다.
DMG 엔진은 '땅, 물, 하늘에서 모두 쓰인 최초의 엔진'이었다.
다임러는 1900년 사망했다.
그래도 마이바흐는 DMG의 기술책임자로 한동안 남았다.
이 시기 '메르세데스'라는 자동차 이름이 탄생한다.
DMG 고객 중에 사업가 에밀 옐리넥이 있었다.
옐리넥은 엔진의 무게중심을 더 낮게 한 차량을 원했다.
마이바흐는 옐리넥 요구에 따라 23마력짜리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 차에 옐리넥은 딸 '메르세데스'의 이름을 붙였다.
이듬해 니스 자동차 경주대회에 출전했는데, 우승했다.
옐리넥은 '메르세데스'가 잘 팔릴 거라고 보고, 36대를 주문했다.
마이바흐가 설계하고, DMG가 만들어, 옐리넥이 팔았다.
35마력짜리 메르세데스는 '완판'이었다.
DMG는 모든 차량에 '메르세데스'를 붙였고 1902년 상표등록했다.
시대는 천재 엔지니어를 자동차에만 묶어두지 않았다.
군인 출신의 과학자였던 페르디난트 체펠린 백작이 연락했다.
비행선 '체펠린'에 쓸 엔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음 회에 마이바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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