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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의 닮고 싶은 책] 고라니에게 삶을 돌려줄 수 있다면…'이름보다 오래된'

  • 등록: 2023.08.05 16:48

  • 수정: 2023.08.05 20:43

/가망서사 제공
/가망서사 제공

개와 함께 산 초입길을 산책하다가 고라니를 만난 일이 있다. 표적이라도 발견한 듯 그쪽을 향해 힘껏 달려가려는 개를 막아서면서, 나는 잠시 고라니와 눈을 마주쳤다.

1초, 2초, 3초. 어쩌면 더 짧은 시간이었을까. 고라니는 곧 엉덩이를 보이며 황급히 산 위로 달아났지만, 내게는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다만 살고자 하는 한 생명 앞에서, 나는 그를 위협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인간에게는 오직 인간만이 있을 뿐, 다른 존재는 온통 익(益)이 아니면 해(害)다. 우리에게 무엇 하나라도 도움이 되면 곤충도 익충이고, 그렇지 않으면 해충이다. '유해 동물'이라는 말을 숱하게 듣지만 여전히 그 말뜻을 모르겠다. 모든 동물에게서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빼앗으면서, 피해자의 자리까지 차지하려 드는 것은 정말이지 고약하지 않나.

/가망서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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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희 작가가 10년에 걸쳐 찍은 고라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내가 느낀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다. 이들에게 삶을 돌려주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려는, 살아 있게 두지 않으려는 세상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다는 것.

동물권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종종 우스개처럼 꺼내는 말이 있다. 유해야생동물의 대표격인 고라니가 한국에서마저 자취를 감출 즈음, 우리는 종 보존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거라고. 남은 개체 수를 지켜야 한다며 목소리 높이고, 인공수정으로 새끼를 태어나게 하려고 거기에 어마무시한 돈을 쏟아부을 거라고. 이 무슨 지독한 농담인지.

작가의 말처럼 쥐와 너구리, 비둘기와 멧돼지는 우리가 이름 붙이기 전부터 이 세상에 존재했다. 지금, 이름보다 오래된 존재들이 지워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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