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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의 닮고 싶은 책]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묻다…김탁환 '사랑과 혁명'

  • 등록: 2023.10.09 18:06

  • 수정: 2023.10.09 18:39

/해냄 제공
/해냄 제공

19세기 초, 조선 사람들은 살기 위해 천주를 믿었다. 계급에 차별이 없고 성별로 일을 나누지 않는 곳. 노인과 아이가 서로를 존중하며 마주보는 곳. 그곳 곡성 교우촌에서라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조선은, 신부가 들어오기 전 천주를 받아들인 유일한 나라였다.

사회파 소설을 주로 써 온 김탁환이 이들의 이야기에 자기 몸을 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책의 서문 격인 '읽는 마음'에서 그는 "마시고 싶지 않은 잔이지만 마냥 사양할" 수는 없었다고 썼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였으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쓰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자 김탁환은 "역사의 검은 구멍들을 오직 나만 들여다보며 이야기로 푼다"는 떨리는 마음으로 집필에 돌입한다.

'정해박해'는 1827년 전남 곡성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옥사를 말한다. 당시 조정은 천주교인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약 500명의 교인이 체포됐고, 이후 지독하게 고문당했다. 대다수가 배교 서약을 한 뒤 풀려났지만 16명은 끝내 순교자의 길을 택했다. 이들의 바람은 단 하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희망과 절망, 미움과 사랑, 의심과 믿음을 갈라 언행을 평하고 답을 구하지 않았다. (…) 배교와 치명 사이, 교우 마을과 외교인 마을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더 오래 들여다보고자 했다. 흐릿하고 복잡하고 지루한 혼돈의 날들이여! 스미고 젖어 빛이 되기도 하고 어둠이 되기도 했다. 빛이 어둠이었고 어둠이 빛이었다."

원고지 6000장 분량의 이번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김탁환은 집필실마저 곡성으로 옮겼다. 천주교인들이 갇힌 채 고문받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기도하지 않아도 자주 기도하는 마음이 됐다.

19세기 초 조선의 이야기지만 새삼스럽게 읽히지 않는 것은 소설 속 상황이 지금-여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지배 계층, 가능성을 상실한 채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내는 민중들. 변화의 씨앗은 어디에 있을까? "다음을 향하는 몸짓"(정세랑)을 구하는 간곡한 마음으로 책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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