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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 일기] 안희연 '당근밭 걷기'

  • 등록: 2024.06.26 16:51

  • 수정: 2024.06.26 17:20

/문학동네 제공(예스24 캡처)
/문학동네 제공(예스24 캡처)

돌을 태운다
사실은 돌 모양의 초

누가 나를 녹였지?
누가 나의 흐르는 모양을 관찰하고 있지?
돌이 나의 질문을 대신해주기를 기대했는데

돌은
자신이 초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무고하게 빛난다

돌이 녹는 모양을 본다
돌 아래 흰 종이를 받쳐두어서
흐르는 모양 잘 보인다

너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겪는구나
너는 네게 불붙인 손 사랑할 수 있니

창밖에는 갈대 우거져 있다
횃불 든 사람들 오고 있다

제 머리카락은 심지가 아니에요
발끝까지 알아서 태울 테니 불붙이지 마세요
흰 종이 위에 스스로 올라서서 하는 말

또 한번의 밤이 지난다
아침이 오면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의 모양

굳은 모양을 보면
어떻게 슬퍼했는지가 보인다
어떻게 참아냈는지가

- '간섭'

반복해 읽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을 저릿하게 하는 시다. 종이 위에서 돌이 조용히 녹아내릴 때 어쩐지 내 마음도 함께 타는 것 같다. 돌은 흐르고, 누군가는 그 흐르는 모양을 관찰한다. 돌은 아마도 발끝까지 탈 것이다, 스스로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 그 타고 남은 빛 속에서 발견되는 것을 시인이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의 모양"이라고 말할 때, 시인의 마음에 뜨거운 손을 포개고 싶어진다. 지붕의 색을 보고 멀리서 손 흔드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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