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흔들릴 것이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처럼!"
우크라이나 유대인 농부가 딸을 시집보내며 애틋한 마음을 쏟아냅니다.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이 아이가 내가 안아 키우던 그 소녀인가. 저 아이가 장난치던 그 소년인가…"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아니라 '지붕 위의 바위' 라는 시가 있습니다. 바람에 들썩이는 슬레이트 지붕을 눌러 앉히는 바위처럼, 묵직하고 속 깊은 아버지를 노래합니다. 그런데 자식도 아버지의 바위였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싶을 때마다 당신은, 나를 업어보곤 하였단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겠지요.
'연우 아빠가 연우 때문에 식물도감을 샀다. 젊은 아빠가, 아장아장 어린 아들을 그늘에 앉히고,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는 풍경…'
얼마 전 양산 통도사 자장암에 놓인 시주함에 누군가 2백만 원과 함께 편지를 남겼습니다.
바로 그 시주함에서 27년 전 3만 원을 훔쳤던 소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소년은 며칠 뒤 또 시줏돈을 훔치러 갔다가 스님에게 들켰답니다.
'스님은 제 어깨를 잡고, 말없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으셨습니다. 그날 아무 일도 없었고 집으로 왔습니다.'
고백은 이어졌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남의 것을 탐한 적이 없습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 스님은, 통도사 주지를 지내고 자장암으로 돌아와 계신 현문 스님 이었습니다. 아이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밖으로 바래다 줬다고 또렷이 기억했습니다. 자칫 빗나갈 수 있었던 삶을 제 길로 이끈 것은 바로 '용서의 힘' 이었습니다. 스님은 각별히 편지 끝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했다고 했습니다.
'곧 아기가 태어납니다. 아기한테 당당한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눈동자에 비친 사람 형상을 눈부처라고 합니다. 아기의 맑은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눈부처를 본 시인이 밤새워 시를 썼습니다.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 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 아들딸들이, 어머니 아버지 뵈러 고향으로 갑니다.
9월 13일 앵커칼럼 오늘 '아버지가 된다는 것'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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