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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Talk] 어린이집이 혐오 시설이 되는 현실…저출산이 해결될까요?

  • 등록: 2025.03.21 15:43

  • 수정: 2025.03.21 18:25

700여 세대가 사는 서울 종로의 한 주상복합 아파트. 세종대로와 광화문 광장을 생활권으로 둔 데다 단지 내 커뮤니티도 시설이 완비돼 있어 준공 이후 ‘명품 주상복합’이란 별명이 따라다녔습니다.
 

/TV조선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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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파트에서 지난해부터 극심한 주민 갈등으로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인근 교회 어린이집이 폐원하게 되자, 단지 내에 국공립 어린이집을 만들어 달라는 워킹맘들과 “명품 주상복합에 어린이집은 없다”며 반대하는 주민 간 대립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흔히 지역 이기주의를 일컫는 ‘님비 현상’ (NIMBY : 'Not In My Back Yard' 내 뒷마당엔 안 돼) 이라고 한다면 쓰레기 집하시설이나 화장터, 교도소 등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만 0살에서 5살 이하의 영유아가 다니는 국공립 어린이집이 돌연 혐오시설처럼 취급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TV조선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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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 반대파가 내세우는 주된 이유는 ‘사유 재산권 침해’입니다. 반대파 주민들이 만든 비상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아파트 유휴공간은 입주민을 위한 시설로 사용하는 것이 우선시 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공립 어린이집이 들어오면 외부 어린이들과 학부모, 선생님들이 아파트로 출입하면서 소음과 먼지는 물론 사고 위험성까지 높아질 것”이란 우려도 덧붙였습니다. 어린이집 차량은 1대에 불과하기 때문에 주민 주차장과 분리할 수 있고, 아이들 산책 역시 하루 1~2번에 불과해 소음이 크지 않다고 설명해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주민 찬반 투표에 올려 가부를 결정하자는 엄마들의 요청도 거부합니다.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안건을 상정해 투표를 하려는 진행 자체가 잘못됐다”는 겁니다.
 

/TV조선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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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린이집을 반대하는 비대위의 입장문을 보면 하나 흥미로운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000에 거주하셔서 아시겠지만 명품 주상복합에 어린이집은 없습니다”란 이 문장인데, 결국 “우리끼리 사는 명품 주상 복합 안에 외부 아이들이 들어오는 게 싫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실제로 반대파 주민들은 입주민 공청회에서 “외부인들에게 아파트 문호를 열어줄 경우 한부모 가정이나 장애아동, 다문화 자녀들도 들어오게 되고, 결국 집값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습니다. 국가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어린이집은 70%는 아파트 주민 자녀가, 나머지 30%는 다른 지역의 아동이 입소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소수라도 ‘다른 동네 아이들’이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게 싫다는 이들의 주장엔, 폐쇄적인 아파트 커뮤니티 문화가 급기야 '약자 혐오 정서'로 번지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TV조선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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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관리비로 운영되는 헬스장과 독서실, 조식뷔페 등에 대해 아파트 입주민의 독점 이용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건 타당한 주장입니다. 평당 2억 원을 경신한 서울 반포 원베일리에서 입주자 자녀들끼리만 만나는 맞선 모임을 결성했단 소식 역시 ‘입주민 구별 짓기’란 씁쓸함을 안길지언정 법이나 규정을 어겼다고 볼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어린이집 유치를 막기 위해 주민 정보를 캐내 협박을 하거나, 관련 공무원이나 시설관리업체 직원에게 ‘갑질’을 행사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협박이나 모욕, 허위사실 유포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파 주민들은 어린이집 유치를 막기 위해 선을 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TV조선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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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반대파 주민들은 찬반 투표를 통해 어린이집 설치를 결정하자는 워킹맘 C씨의 신상정보를 알아낸 뒤, C씨 남편 회사에 항의 메일을 보냈습니다. 어린이집이 부족하다는 민원을 접수한 구청 공무원에겐 “비리가 의심되니 직위해제를 시켜야 한다”며 감사부서에 수차례 신고 했습니다. ‘엄마들과 한 편’이란 오해에 시달렸던 아파트 관리소장은 “소장직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8월에 아파트 관리업체 재계약을 못하게 만들겠다”는 주민 협박을 이기지 못해 급기야 지난달 사표를 냈습니다. 해당 사안을 취재하는 기자와 언론사 역시 아파트 무단침입으로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항의에 여러 날을 시달렸습니다. 어린이집 유치를 둘러싼 난타전이 험악해질수록 엄마들의 불안감은 커지고, 결국 아이 안전을 위해서라도 설치 요구를 거둬드릴 거란 계산은 어느 순간 도를 넘었습니다.
 

/TV조선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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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을 둘러싼 아파트 주민 전쟁은 진행 중입니다. 당장 아이 맡길 곳이 없어진 엄마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사를 가거나, 홀로 남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공공 어린이집이 설치돼 있는 근처 아파트로 이사를 간 워킹맘 D씨는 취재진에게 “아이 돌봐줄 가사 도우미가 없느냐? 먼 거리의 어린이집으로 이동할 차가 없느냐? 정 힘들면 엄마가 퇴사하면 되지 않느냐? 돈이 없냐?”는 이웃의 날선 말에 결국 집을 떠나게 됐다고 말합니다. 우리끼리만 살고 싶은 명품 주상복합 아파트에선 어린이집마저도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됐습니다. 저출생 문제엔 공감하면서도 정작 내 아파트 안에 다른 동네 아이들이 들어오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도 한때는 온 마을의 돌봄이 필요한 아이였던 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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