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Talk] 한미 FTA는 "매국", 3500억 달러 투자 약속은 "애국"?
등록: 2025.11.03 오후 16:08
수정: 2025.11.03 오후 17:01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관세 및 무역협상에 쉼표를 찍게 된 것은 다행입니다. 앞으로 반도체와 방위비 협상이라는 큰 산이 남아있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매우 의문이 드는 지점이 있습니다. 과거 한미 자유무역협정(이하 FTA) 협상 과정에서 강하게 반발했던 세력들이 이번에는 '대단한 성과'라고 추켜세우는 것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왜 미국에서 관세 협상을 다시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앞으로 얼마가 더 들어갈지도 모르는 협상이 남았는데 "대한민국 외교사에 길이 남은 최고의 협상이자 최대 성과"라고 평가해 버리니 말입니다.
진보 진영의 '한미 FTA' 필사 저지에 실망했던 盧
지난 2006년 7월13일, 현대자동차 노조는 울산공장 본관 앞에서 '부분 파업 및 한미 FTA 저지 집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 상황을 전해 듣고, "FTA로 피해를 보는 농민들이 반대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오히려 밥그릇이 커지고 가장 큰 혜택을 보는 현대차 노조가 파업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건 완전히 정치 파업"이라며 노동계쪽에 큰 실망감을 표했고, 그 이후로 노동계쪽과 멀어지게 됐다고 김병준 전 정책실장이 밝힌 바 있습니다.
김 전 실장은 "한미 FTA 추진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군 진영 절반이 떨어져 나갔고, 그로 인해 임기 막판과 퇴임 이후 정치적으로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하면서, "그 이후 민주당의 리더는 지속적으로 아군을 잃지 않기 위해 합리성을 저버린 채 진영 논리 속에 계속 갇히게 됐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한미 FTA 비준 막으려 국회에 '빠루', '전기톱' 동원
이렇듯 노 전 대통령이 아군의 반대 속에서 큰 틀을 잡았던 한미 FTA는,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야당과 진보 진영의 극렬 반대 속 우여곡절 끝에 비준 및 발효됐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과거 노 전 대통령 시절 보다 더욱 험난했습니다. 지난 2008년 12월18일 당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 주변엔 공사장 해머와 소위 '빠루', 전기톱, 소화기 등의 '연장'까지 등장했습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은 닫힌 회의장 문을 열기 위해 성인 팔 크기의 해머 등으로 문고리를 부쉈는데, 이 모습이 언론에 잡히지 않도록 손을 들어 가림막을 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문틈이 벌어지자 '빠루'로 한쪽 문을 뜯어냈습니다.
그런데 문 안쪽으로 국회 경위와 한나라당 당직자들이 책상과 소파 등으로 설치한 바리케이드가 보이자, 야당 당직자들은 집기를 해머로 내리치고 소형 전기톱으로 절단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여당 쪽에서 계속 집기를 더 쌓으려 하자, 야당 당직자들은 소화용 호스를 끌어와 집기 틈새로 물을 뿌렸습니다. 이에 맞서 회의장 안쪽에 있던 경위들은 반대쪽으로 소화기를 분사해 회의장 주변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습니다. 2011년 11월22일엔 당시 민노당 소속 김선동 의원이 한미 FTA를 막겠다며 '최루탄'까지 터트렸는데, 민노당(현 진보당)은 여전히 한미 관세협상에 대해 "약탈"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관련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野, FTA 발효되자 MB 향해 '매국적 서명'
당시 야권에선 이명박 전 대통령을 향해 무도하고도 매국적 서명을 했다며, 이른바 '광우병 촛불집회'에 이어 제2차 정권 퇴진운동에 나섰습니다. 여당 수뇌부는 을사역적에 비유하면서 강하게 비판했고, 심지어 외교부 국장급 인사들을 향해서도 "매국노"라고 비난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성안한 내용의 90%가 유지됐고 자동차 관련 내용 등에 대해서만 일부 조정했는데, 참여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지낸 모 의원은 "쿠테타"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극렬 저항했습니다.
마치 이 전 대통령과 여권이 미국에 경제 주권을 내준 것 마냥 여론전을 펴갔고, 불현듯 여당 의원 전원의 전화번호가 담긴 게시물도 시중에 유포됐습니다. 국회의원 개인이 아닌, 집단의 전화번호가 유포된 건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미 FTA 이후 정말 경제 주권 내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무역 불균형이 더욱 심화됐다며, '미국의 재건(Make America Great Again)'을 또 다시 앞세웠습니다. 상대 후보가 각종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던 트럼프 후보였음에도, 현직 대통령이었던 바이든 후보가 '대선 레이스' 완주 조차 못할 정도로 민주당의 인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결국 트럼프 후보가 재선에 성공했고, 예고한 대로 '무역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한 수단으로 '관세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한미 FTA 10년 동안 한국은 매년 미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냈습니다, 2022년 3월14일 산업통산자원부에 따르면 지난 2023년엔 상품 무역에서 1869억 달러, 대미 무역수지 455억 달러로 역대 최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을 재치고 우리나라가 최대 수출 상대국에 올랐습니다. 10년 새 고군분투했던 반도체(246.6%), 컴퓨터(259%), 냉장고(130.9%), 합성수지(244.9%), 건전지 및 축전지(634.6%) 등의 세 자릿수 증가율 덕분입니다. 자동차 시장 점유율도 어느새 두 자릿수로 올라섰죠.
2024년에도 한국은 미국에 660억 달러 상품 무역 흑자를 기록했죠. 미국 역시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가 4배 가까이 늘어나는 효과를 거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눈에는 이런 데이터가 들어올리 없겠지만요.
또 FTA 체결 당시 농축수산물 업계의 우려와 달리 농축수산물도 수입보다 수출 증가율이 더 높게 나타났습니다. FTA 발효 이후 농축산물 수출액(2012~2021년 평균)은 발효 전(2007~2011년 평균) 대비 95.2% 증가했고, 수산물 수출액도 발효 전 대비 평균 99.4% 증가했습니다. 반면 농축산물과 수산물 수입액은 각각 34.1%, 73.9% 증가해 실 보다 득이 더 컸습니다.
FTA는 매국이라더니, 3500억 달러 투자 약속은 애국?
한미 정상이 정상회담을 통해 관세협정을 마무리 지은 다음 날, 민주당 지도부는 "대한민국 외교사에 길이 남은 최고의 협상이자 최대 성과"라고 평가했습니다.
"협상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도움되는 최상의 협상이었다"며 "3500억 달러 선불 요구를 할부로 바꿔내면서 우리 외환시장의 불안정성을 최소화했다. 이것이 바로 애국"이라고 했습니다.
상호관세 및 자동차 관세율은 15%로 낮추되 농축산물을 추가 개방하지 않기로 했다는 정부 발표를 놓고는 "그야말로 엄지 척이 절로 나오는 최대의 성과"라고도 했지요.
그러면서 "이번 한·미 관세 협상안이 즉시 국회 비준 동의 절차를 거쳐 하루라도 빨리 적용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민주당은 MB 정부시절 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수출품목 관세율이 0%였고,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농축산물을 개방했을 때 "매국"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국회에서 한미 FTA 비준안이 처리된 이후엔 전 상임위로 투쟁 범위를 넓혔고, 상임위 회의장 점거 비율을 점차 높여가기도 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매국 행위'로 인해 대미 흑자는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미국의 심기는 계속 불편해져 갔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매국'이라는 표현에 대한 사과는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여 년 간 무역 불균형이 심해졌다는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에게 투자 명목으로 내민 3500억 달러짜리 ‘관세 청구서’에 서명한 대통령에 대해선, "대담한 승부수가 이뤄낸 쾌거"라며 "참으로 똑똑한 협상가다. 자랑스럽다"고 극찬하며 국회 차원에서의 총력 지원을 다짐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한 고비 넘겼지만 앞으로도 '험난'
미국 조야에서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는 말들이 나옵니다. 미국 입장에선 반도체나 방위비 협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번 관세 협상에서 전력 투구하지 않았다는 취지입니다. 관세협상 직후 나온 트럼프 대통령과 미 재무장관의 "반도체 협상은 별개"라는 주장과 결을 같이 하는 분석으로, 앞으로의 협상은 더 어려울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이재명 대통령은 앞으로 더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할 텐데요. 집권 여당이 그 수고를 적잖이 덜어줘야 할 때입니다.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약탈"이라며 항의 시위를 하다 갑자기 트럼프를 추켜 세우는 '냉온 전략'에서 벗어나, 협상 실효성을 제고시킬 수 있는 훌륭한 '페이스 메이커'가 돼 주는 게 국익에 보다 부합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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