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지연 해소를 통한 '신속한 재판' 실현이 사법제도 개편의 방향이 돼야 한다는 사법부 안팎의 제언이 9일 대법원 법원행정처 주최 공청회에서 나왔다.
토론에 참여한 한 시민단체 인사는 "사실심 부실과 지연이 '진짜 문제'"라며 "대법관 증원은 오진에 기초한 잘못된 처방"이라고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사법개혁 방향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법원행정처는 이날 오전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청심홀에서 법률신문과 공동으로 '국민을 위한 사법제도 개편: 방향과 과제' 공청회를 열고 '우리 재판의 현황과 문제점'을 주제로 첫 번째 세션을 진행했다.
발표자로 나선 기우종 서울고법 인천재판부 고법판사는 "2010년대 중반까지는 효율성 중심의 사법절차로 민·형사 재판의 신속성은 매우 우수한 편에 속했으나, 이후 점차 재판의 속도가 느려져 어느덧 재판 지연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됐다"고 지적했다.
1심 민사합의 사건의 평균처리기간은 2017년 293.3일에서 지난해 437.3일로 49% 증가했고, 1심 형사합의는 같은 기간 150.8일에서 198.9일로 31% 늘었다.
행정처 사법지원실장을 역임했던 기 고법판사는 2020년대 이후 재판 지연의 원인으로 코로나19 영향과 함께 고난이도·고분쟁성 복잡 사건의 증가, 법관 평균연령 증가로 인한 사건처리 효율성 저하 등을 꼽았다.
그는 해결책으로 사실심(하급심)의 인적·물적 자원 추가 투입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기 고법판사는 "국민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대부분의 사건은 1, 2심(사실심)에서 결정되므로 국민의 사법 신뢰를 위해서는 '재판지연 해소'가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 밖에 보이스피싱 사건과 같이 법정형 상승으로 인해 합의부 관할이 된 형사사건의 '단독 관할화'를 위한 입법, 시니어 법관 제도, 사법보좌관 업무범위 확대 등도 재판지연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제시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공두현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재판 지연의 배경으로 2018∼2019년 법관임용자격의 법조경력이 급상승하면서 신규 임용이 급감한 점, 반면 2020년대 들어 퇴직법관의 수가 급증한 점을 꼽으면서 "재판지연을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지속적인 법관 증원"이라고 짚었다.
판사 출신으로, 지금은 학계에서 법조 후속세대 양성을 담당하는 공 교수는 이를 위해 법관 신규임용 절차를 다변화하고, 대규모 법관 신규임용을 위해 법관 후보군 양성과 함께 법관으로서 긍지와 보람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법원을 더욱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원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수석부회장) 역시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는 법관 정원을 늘려 법관 1인당 업무량이 적정하게 조정돼야 한다"면서 판사 처우 상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법관 처우를 대폭 상향해 최우수 인재가 법관직에 투신해 장기근속할 유인이 필요하고, 반면 공정성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역량이 일정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재판 업무에서 배제하고 다른 직무로 전환하거나 면직을 유도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시민입법위원장인 정지웅 변호사는 "지금 우리 사법부는 '동맥경화'에 걸려있는데 정치권에서는 엉뚱한 처방전을 내놓고 있다"며 대법관 증원에 초점이 맞춰진 사법개혁 방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재판지연의 병목 현상은 대법원이 아니라 1심과 2심, 즉 사실심에서 발생하고 있다. 우리 사법 시스템의 진짜 문제는 '사실심 부실화와 지연'에 있다는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대법관 수만 대폭 늘리면 이는 가뜩이나 힘겨운 하급심의 '인력 공동화'를 가속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1심 재판부는 경력이 짧은 판사들로 채워지고, 재판의 질은 더 떨어질 것이며 불복률은 높아져 상고심 사건은 더 폭증하는 악순환이 불 보듯 뻔하다"며 "사법개혁의 최우선 순위는 대법관 증원이 아니라 사실심 법관의 대폭적인 증원과 재판 지원 인력의 확충이다. 예산과 인력을 '머리'가 아닌 '손발'에 집중해달라"고 덧붙였다.
정 변호사는 이와 함께 여권에서 추진 중인 내란전담(특별)재판부에 대해서도 "특정 정치적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입맛에 맞는 특정 성향의 판사들로 구성된 재판부를 만든다면 그 재판부에서 내려진 판결을 국민들이 '공정한 법의 심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강조했다.
그는 "만약 이번에 내란전담재판부를 허용하면 다음 정치권에서는 가령 '선거사범 전담부', '대형재난사건 전담부'를 만들라고 요구할 것"이라며 "그때마다 사법부는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재판부를 만드는 '정치적 하청기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행정처가 사법개혁 의제와 관련한 다양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련한 이번 공청회는 오는 11일까지 사흘간 진행된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많은 국민들이 사법에 대한 높은 불신을 보여주고 있다"며 "공청회에서 여러 전문가와 시민들이 들려주시는 귀한 목소리를 경청할 것이고, 사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찾는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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