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Talk] 누가, 얼마를, 왜…국세청이 브리핑 때마다 답하지 않는 3가지
등록: 2026.05.04 오후 16:35
수정: 2026.05.04 오후 17:53
재료 없이 요리하라는 국세청, 브리핑의 민낯
국세청 브리핑 때 기자실은 늘 같은 풍경이다. 화려한 성과 수치가 발표되고 기자들이 구체적 질문을 던지면 돌아오는 답은 판에 박힌다. "국세기본법상 공개가 어렵습니다."
기사를 요리에 비유하자면 금액·시점·대상·맥락이라는 기본 재료가 있어야 한 접시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국세청은 매번 접시만 내밀고 재료는 건네지 않는다. 이것은 기자들의 투정이 아니다. 글쓰기의 가장 기본인 육하원칙의 문제다. 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왜, 이 여섯 가지 중 절반이 빠진 채로 기사를 쓰라는 것은 뼈대없이 건물을 올리라는 것과 같다. 기자들이 브리핑 때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은 보다 정확하고 충실한 기사를 쓰고 싶은 직업적 욕심이다. 그런데 국세청은 그 욕심에 벽을 세운다.
보도자료를 받으면 절로 한숨
국세청 출입기자들 사이에는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경험이 있다. 보도자료를 받아드는 순간 나오는 한숨이다. 보도자료를 펼치면 사례마다 금액이 들어갈 자리에 '00억 원', '000억 원'이 빼곡하다. 두 자리면 10억부터 99억까지, 세 자리면 100억부터 999억까지다. 100억과 999억은 무게가 전혀 다른 뉴스인데 보도자료는 그 차이를 '000억 원'이라는 다섯 글자로 뭉뚱그린다. 어떤 보도자료는 아예 금액란이 공란이다. 빈칸만 보고서는 기사의 뼈대를 세울 수가 없다.
그래서 기자들은 브리핑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안다. 오늘도 질의응답 시간의 절반은 "이 000억 원이 도대체 얼마입니까?"를 묻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을, 발표의 배경이나 정책적 의미를 캐물을 시간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질문에 돌아올 답이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안다.
브리핑장의 풍경
최근 해외 은닉재산 환수 브리핑에서 기자들은 339억 원의 내역을 물었다. 5건 가운데 고액·상습 체납자 3건의 비중이 얼마인지, 사례별 구간이라도 알려달라고 했다. 답은 "외국 과세당국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납세자 추정 우려가 있다"였다. 이미 명단이 공개된 체납자의 징수액을 물으니 "명단 공개와 징수 실적 공개는 별개"라며 선을 그었다. 체납액은 홈페이지에 공개하면서 징수액은 "또 다른 정보"라는 논리다.
급기야 보도자료에 적힌 매년 금융정보 자동교환 119개국과 개별 이슈로 정보교환 중인 163개국이라는 숫자의 관계를 묻자 "일일이 대조를 안 해 봤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기가 내놓은 숫자의 관계조차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기자들은 "겹치는 거냐", "합집합이 얼마냐"를 한참 되물어야 했고 결국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로 끝났다.
지난 3월 주식시장 불공정 탈세 세무조사 결과 브리핑에서도 보도자료 사례의 금액이 전부 '00억 원'이었다. 27개 기업에서 6,155억 원의 소득 탈루를 확인하고 2,576억 원을 추징했다는 발표인데 정작 개별 사례의 금액은 빈칸이다. 시세차익 최고액을 물으니 "나중에 확인하고 설명드리겠습니다." 유형별 탈루 금액을 물으니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가 뒤늦게 숫자를 내놓았다. 기자가 하나하나 캐물어서야 "18억 원", "35억 원", "42억 원" 같은 숫자가 나왔다.
지난해 11월 민생침해 탈세자와 관련해서 암표업자 세무조사 브리핑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드러냈다. '최대 30배 폭리'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는데 기자가 "30배 폭리를 취한 건 어떤 공연이었습니까?"라고 묻자 답은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였다. 브리핑의 핵심 키워드를 브리퍼 자신이 모르는 것이다. 기자가 암표업자들의 매크로 사용 여부를 물었을 때는 더 놀라운 답이 나왔다. "돌리지 않고서 이게 이 많은 표를 매집하고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브리핑 현장에서 추측을 하고 있었다. 자기 조직이 수행한 조사의 기본 사실관계를 브리퍼가 파악하지 못한 채 단상에 선 것이다.
지난해 8월 외국인 부동산 탈세 세무조사 브리핑에서는 한 기자가 그동안 쌓인 답답함을 정면으로 꺼냈다. "저희 금액 관련해서 다 OO으로 표현이 되잖아요. OO 두 자릿수면 10억부터 99억까지 갭 차이가 너무 커요. 기사의 적확성도 떨어지고 저희도 늘 상당히 곤란합니다." 돌아온 답은 이랬다. "이번 기사는 수십억 원으로 쓰시면 됩니다." 국세청이 기자에게 기사 작성법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기자가 물어야 할 것은 외국인 부동산 투기의 구조적 원인, 내국인과의 역차별 문제 같은 정책적 쟁점이다. 그런데 기사에 쓸 금액 구간조차 확보하지 못해 "수십억 원으로 쓰면 되느냐"를 물어야 하는 처지다.
숫자 확인에 다 쓰는 질의응답
이 브리핑들의 질의응답 녹취록을 읽으면 하나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기자들의 질문 대부분이 발표의 배경이나 정책적 함의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금액·건수·대상 같은 기본적 사실 확인에 매달려 있다는 점이다. "고액 3건이 339억 중 얼마냐." "00억 원이 얼마냐." "초고가 아파트가 얼마대냐." "총피해금액이 200억이 맞냐." "법인과 개인이 각각 몇이냐."
본래 질의응답은 발표를 한 단계 더 파고드는 시간이어야 한다. 해외 은닉재산 환수가 늘었다면 국제 조세 환경의 구조적 변화인지를, 주식시장 불공정 거래를 적발했다면 제도적 허점과 재발 방지를, 암표업자를 잡았다면 플랫폼 규제의 사각지대를 물어야 한다. 그래야 단순한 숫자 나열이 아닌 입체적이고 심층적인 기사를 국민에게 전할 수 있다. 그런데 보도자료가 '00억 원'과 '000억 원'으로 채워져 있으니 기자들은 제한된 질의응답 시간을 숫자 확인에 소진할 수밖에 없다. "얼마입니까?" "확인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건요?" "그것도 확인하겠습니다." 이 핑퐁이 질의응답의 절반 이상을 잡아먹는다. 깊이 있는 질문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기자들은 기사의 뼈대가 아닌 빈칸 목록을 들고 기자실을 나온다.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국세청 자신이다. 브리핑 뒤 나오는 기사는 "국세청, 000억 원 추징"이라는 단선적 스트레이트에 그치기 십상이다. 정책의 맥락과 성과를 분석하는 심층 기사는 재료가 없으니 쓸 수가 없다.
법 뒤에 숨는 관행
국세기본법 제81조의13은 과세정보의 비밀유지를 규정한다. 그런데 이 법의 적용 기준이 브리핑마다 다르다. 해외 은닉재산 브리핑에서는 수억 원 구간조차 못 밝히고 주식시장 브리핑에서는 같은 법 아래서 억 원 단위의 구체적 금액을 밝힌다. 외국인 탈세 브리핑에서는 "2,000억에서 3,000억 사이"라고 러프하게 던지면서도 사례별 금액은 'OO억 원'으로 막는다. 암표업자 브리핑에서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과세정보이기 때문에" 한다면서도 바로 뒤에 "4억 이상"이라고 말한다. 과세정보라면서 금액은 말하는 것이다.
법이 보호하는 것은 개별 납세자의 구체적 과세정보다. 정책 실적의 통계적 윤곽까지 이 조항으로 막는 것은 납세자 보호를 넘어선 행정 편의주의에 가깝다. 체납액은 법에 따라 공개하면서 징수액은 "또 다른 정보"라고 막는 것은 법리적으로도 일관성이 떨어진다. 비공개의 기준이 법률이 아니라 브리퍼의 재량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법치가 아니라 관행이다.
더 나은 기사를 위해
기자들이 국세청의 성과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339억 원의 환수도, 6,155억 원의 탈루 적발도, 암표업자 첫 기획조사도 분명 의미 있는 성과다. 기자들은 그 성과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역설적으로 지금의 방식은 국세청 스스로의 성과를 훼손하고 있다. 맥락이 빠지니 "(이번 환수 이전) 10년간 33억밖에 못 거뒀다는 얘기 아니냐"는 질문이 나오고 보도자료가 '00억 원'으로 가득하니 숫자의 신뢰성부터 의심받고 "확인해서 알려드리겠다"가 반복되니 조사의 충실성마저 의문시된다. '30배 폭리'를 타이틀로 내걸고서 어떤 공연인지 모른다면 국민은 그 타이틀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보도자료의 '00억 원'과 '000억 원'을 실제 숫자로 채워야 한다. 비공개 기준을 조직 차원에서 통일하고 브리퍼가 자기 조사의 기본 사실관계를 숙지한 채로 단상에 서는 것도 필요하다. 기자들이 "00억 원이 도대체 얼마냐"가 아니라 "이 정책이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를 물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단선적 스트레이트가 아닌 심층 기사가 나오고 국세청의 성과도 제대로 빛을 받는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이 여섯 가지를 묻는 것은 국세청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채워져야 기사가 되고 기사가 되어야 국민이 알 수 있다. 국세기본법은 납세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지, 국세청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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