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우리 부담을 줄여준 거니 봐달라"
지난 2월 23일, 공정거래위원회 기자실. 음잔디 기업집단관리과장이 영원의 동일인 성기학 회장 검찰 고발 결정을 발표하면서 한 말이 인상적이다. "영원 측은 공정위가 2022년까지는 계열회사 현황 등 핵심 자료만 제출하도록 요청했기 때문에 자료 제출에 소홀하였던 점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 주어야 한다고 적반하장식의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식 브리핑에서 '적반하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만큼 영원의 행위가 도를 넘었다는 뜻이다. 자산 5조 원에 못 미치는 작은 집단의 자료 제출 부담을 덜어주려고 공정위가 만든 간소화 절차를 영원은 무려 10년 넘게 "5조 원 미만으로 보이게 만드는 도구"로 활용했다. 그러고는 그 책임을 공정위 탓으로 돌리려 했다. 영원이 이번에 자산 감소를 이유로 2026년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에서 빠졌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는 평범한 통계상의 변동이다. 그러나 영원이 빠져나간 뒷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동일인 제도가 어떻게 안쪽에서 무력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교과서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숨겼나
성기학 회장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년간 지정자료를 제출하면서 총 82개사를 소속회사 현황에서 누락했다. 누락한 회사들의 자산 합계는 3조 2,400억 원에 달한다. 공정위가 적발한 동일인 지정자료 허위 제출 사건 중 역대 최대 규모이자 역대 최장기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을 회피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공정위가 공개한 누락 회사 목록은 더 충격적이다. 성 회장 본인이 지분 100%를 보유한 솜톰과 푸드웰, 둘째 딸·셋째 딸이 소유한 회사, 남동생이 소유한 회사, 가족들이 공동출자한 조카가 최대주주인 회사들이 줄줄이 빠져 있었다. 음 과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본인이 100% 갖고 있는 회사를 누락한 경우는 사실 거의 없었습니다. 자기 딸들 회사, 그것도 거래관계가 있는 딸들 회사까지 누락한 경우도 거의 드문 게 맞습니다."
심지어 누락된 두 딸의 회사들은 영원무역홀딩스, YMSA 같은 주력 계열사와 거래관계까지 있었다. 친족으로부터 계열회사임을 통보받았는데도 누락한 경우, 기존 계열회사의 감사보고서를 보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는데도 들여다보지 않은 경우까지 적발됐다. "몰랐다"는 변명이 통할 수 없는 구조였다.
빈 3년 사이 승계는 끝났다
영원이 단순히 규제를 피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규제가 작동하지 않은 그 빈 시간 동안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다 2023년, 성 회장은 지주회사 격인 주식회사 YMSA 지분의 50%가 넘는 부분을 둘째 딸 성래은 부회장에게 증여했다. YMSA는 영원무역홀딩스 위에 자리한 사실상의 그룹 최정점이다. 성 회장이 100% 가까이 보유하던 이 회사의 최대주주가 둘째 딸로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한 지분 이전이 아니라 그룹 지배구조의 심장이 옮겨갔다는 뜻이다.
만약 영원이 정상적으로 공시대상기업집단에 지정돼 있었다면 이 증여는 대기업집단 공시 의무에 따라 시장에 공개됐어야 했다.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 이익 제공 금지 규제도 함께 적용됐을 것이다. 그러나 감시망이 뚫린 상태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우리나라 재계의 한 그룹 최정점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간 사건이 사실상 깜깜이로 처리됐다.
음 과장은 이 점을 분명히 짚었다. "영원이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을 회피한 2023년에 이루어진 성기학 회장의 둘째 딸 성래은 부회장에 대한 YMSA 지분 증여 등 경영 승계 과정도 공시되지 않았습니다." 누락의 동기와 효과가 무엇이었는지를 압축해 보여주는 한 문장이다.
그리고 빠져나갔다
더 씁쓸한 결말은 영원이 뒤늦게 2024년 처음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된 뒤 2년 만인 2026년에 다시 명단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계열 분리 등으로 자산총액이 5조 원 아래로 떨어진 것이 이유다.
3년간 감시를 피해 승계를 마치고 적발돼 검찰에 고발당하고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규제망에서 빠져나갔다. 검찰 고발이라는 큰 상처가 남긴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영원이 얻을 것은 대체로 얻고 떠난 모양새다. 이 시기에 내부거래나 일감 몰아주기가 있었다 해도 소급해 적용하기 어렵다는 음 과장의 답변이 이 씁쓸함을 더한다. "지정이 그때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지정자료 허위 제출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하지만 그때 당시를 소급해서 하기는 어렵다고 보입니다."
성 회장에 대한 검찰 고발은 분명 의미 있는 조치다. 공정거래법은 지정자료 허위 제출에 대해 2년 이하 징역 또는 1억 5000만 원 이하 벌금을 규정한다. 그러나 그 처벌 수위가 3년간 회피한 규제로 가능했던 승계 작업의 무게에 견주어 충분한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영원의 계산은 빗나갔다
다만 영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결말이 결코 완전한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뼈아픈 결과에 가깝다. 영원이 10년 넘게 5개 계열사만 제출하는 방식으로 자료를 다듬어 온 것은 끝까지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산 5조 원 미만으로 보이게 만들면 공정위는 추가 자료를 요구하지 않고 추가 자료가 없으면 누락 회사들의 존재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 구조가 깨지지 않는 한 회피는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음 과장이 브리핑에서 "5조 원 미만으로 계속 유지하면서 영영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는 시도"라고 표현한 것이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킨다.
그러나 결과는 영원의 의도와 정반대로 흘렀다. 공정위 현장조사에서 누락 사실이 무더기로 드러났고 그것도 본인 100% 보유 회사를 비롯해 누락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운 회사들 중심으로 적발됐다. 적발 규모는 역대 최대였고 회피 기간은 역대 최장이었다. 특별히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빠져나가려했던 시도가 정반대로 역대 최악의 사례라는 낙인으로 귀결된 것이다.
검찰 고발이라는 결과물도 영원이 원했던 그림이 아닐 것이다. 동일인 본인이 형사 피고발인이 됐다는 사실은 단순한 행정 제재와는 차원이 다른 신호를 시장에 보낸다. 향후 거래처, 투자자, 금융기관과의 관계에서 두고두고 부담이 될 변수다. 더구나 공정위가 이번 적발을 '역대 최대 규모', '역대 최장기간'이라는 표현과 함께 공식 브리핑으로 공개하면서 영원이라는 이름은 동일인 제도 회피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음 과장이 브리핑 끝에 강조한 "향후 유사한 위법행위 시도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표현은 곧 영원이 그 경종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원의 회피 시도가 부분적으로 성공한 면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2023년의 승계 작업은 깜깜이로 마무리됐고 회피 기간 중 발생했을 수 있는 거래들도 대부분 소급해 다룰 수 없다. 그러나 그 부분 성공의 대가로 영원은 동일인의 형사 고발, 사회적 평판 추락, 향후 제재의 가중 사유를 떠안았다. 회피의 이익과 적발의 비용을 함께 놓고 보면 영원의 계산이 결국 빗나갔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동일인 제도를 우회하려는 시도가 결국 더 큰 비용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영원 사례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회피의 유혹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회피의 결말이 실패로 귀결되는 사례가 쌓이면 그 유혹은 점차 약화된다. 공정위의 이번 조치가 의미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동일인 제도, 사라질 수 없는 이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각에서는 또다시 동일인 제도 폐지론을 꺼내 들지도 모른다. 폐지론의 핵심은 제도가 작동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제도가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1987년 만들어진 낡은 틀이 글로벌 자본 시대, 다국적 가족 시대, 전문경영인 시대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 규제라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이질적 제도이니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하자는 논리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영원 사건은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생각해보자. 영원이 10년 넘게 자료를 누락하면서까지 회피하려 했던 그 규제는 무엇이었을까. 공시 의무,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 이익 제공 금지, 친족 회사와의 거래 투명성, 모두 동일인 제도가 작동할 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는 장치들이다. 만약 이 제도가 정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형식적 규제에 불과했다면 영원이 그토록 절박하게 빠져나가려 했을까. 아무도 도망치려 하지 않는 규제는 시대에 맞지 않는 규제다. 영원의 회피 노력이 길고 집요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이 제도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부담을 부과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게다가 영원이 회피했던 그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자. 한 그룹의 최정점에 자리한 회사 지분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 시장 참여자 누구도 그 사실을 제때 알 수 없었다. 동일인 제도가 정상 작동했다면 공시됐을 정보가 회피로 인해 영원히 묻혔다. 이것이 1987년의 낡은 문제인가, 2026년 지금 이 순간의 문제인가. 답은 명백하다. 가족을 통한 지분 승계, 친족 회사를 통한 거래, 깜깜이 자산 이전 같은 양상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다. 제도가 구시대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가 다루는 문제 자체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재벌 구조의 특수성이 여기서 결정적이다. 이만한 경제 규모를 갖춘 나라 가운데 창업자 가문이 대를 이어 그룹을 지배하는 구조가 거의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다. 미국·유럽·일본의 대기업들은 대부분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됐거나 가족 지분이 미미한 수준으로 희석됐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이질적 제도라는 폐지론자들의 비판은 한 가지 사실을 빠뜨린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제도가 만들어진 이유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다른 나라가 동일인 제도가 없는 것은 그것이 필요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지 우리나라가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영원 사건은 우리나라가 여전히 그 특수한 현실 한가운데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오히려 시대가 바뀌면서 동일인 제도가 다뤄야 할 영역은 더 복잡해지고 있다. 외국 국적을 가진 2·3세, 글로벌 본사 체제, 미국 상장 한국계 기업, 다국적 가족 구조, 30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등장했다. 쿠팡 사건이 그 새 영역을 보여줬다면 영원 사건은 가장 전통적인 영역에서도 회피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새 영역과 옛 영역 모두에서 도전이 발생하는 시대에 답은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두 영역 모두에서 더 정밀하게 만드는 것이다.
동일인 제도는 이런 도전들에 맞서는 최전선이다. 누가 그룹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지를 시장이 알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이 누구의 가족과 어떤 거래를 하는지가 공개돼야 한다. 그래야 시장 감시가 작동하고 그래야 자발적 지배구조 개선이 유도된다. 이 출발선이 무너지면 그 위에 쌓인 모든 규제가 함께 무너진다. 영원 사건은 그 출발선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집요하게 공격받는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그리고 그 공격이 계속되는 한 제도는 사라질 수 없다.
쿠팡이 촉발시킨 뒤 5년간 이어진 외국 국적자에게도 적용할 것인가하는 논쟁이 동일인 제도의 외연을 시험한 것이었다면 영원 사건은 내국인 총수도 제대로 잡고 있는가 하는 제도의 내실을 시험한 사건이다. 두 시험 모두 결론은 같다. 폐지가 아니라 정밀화다. 잡기 어려운 곳에서도 잡고 잡기 쉬운 곳에서는 놓치지 않는 두 갈래 보강이 필요하다.
남은 질문들
영원은 떠났지만 영원이 남긴 질문은 남았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본사를 두고 우리나라에서 가족과 함께 국내 기업을 운영하는 토종 창업자조차 10년 넘게 시야에서 놓쳤다. 글로벌 본사를 둔 외국 국적 창업자에게 동일인 잣대를 어떻게 들이댈지를 두고 5년을 토론하는 동안 정작 가장 잡기 쉬운 자리에서 새고 있었던 셈이다.
성기학 회장의 검찰 고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영원 같은 회피 시도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제도를 더 촘촘하게 만드는 일, 그 과정에서 동일인 제도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일이 공정위 앞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 창업자 가문이 대를 이어 그룹을 지배하는 구조가 남아 있는 한, 그리고 그 구조에서 사익편취와 깜깜이 승계의 유혹이 사라지지 않는 한 누군가는 동일인이어야 하고 시장은 누가 동일인인지 알아야 한다.
영원이 가장 절박하게 피하려 했던 그 자리, 그곳이 바로 동일인 제도가 지켜야 할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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