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역을 강타한 기록적인 폭염으로 프랑스가 골 머리를 앓고 있다.
대규모 정전, 사업장 단축 운영 등 피해가 속출하고 냉방기기 품귀현상까지 벌어졌다.
에어컨 보급 필요성을 둘러싼 '정치 갈등' 전선까지 형성됐다는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폭염으로 대륙 전체가 펄펄 끓어오르자 생긴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봤다.
■ 지금 프랑스, 얼마나 더울까?
프랑스에서는 지난달 1947년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후 가장 더운 날 기록이 경신됐다.
지난달 23일 남서부 도시 피소스에서 최고 기온 44.3도를 기록했으며 24일엔 파리 기온이 40.9도로 6월 최고 기록을 세웠다.
AFP 통신은 이번 폭염이 시작된 이후로 프랑스 본토 96개 데파르트망(광역 자치권) 중 절반 이상인 54곳에서 40도 이상 기온이 기록됐다고 집계했다.
최근 온라인 상에선 아스팔트가 말랑해져 녹아내리는 영상까지 공유되기도 했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도 속출했다.
지난 3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프랑스를 강타한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해 2천명이 넘는 초과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스테파니 리스트 프랑스 보건부 장관은 현지 방송 TF1과의 인터뷰에서 "지난달 극심한 폭염 기간 총 2천25명의 초과 사망자가 기록됐다"며 "현재 집계된 수치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며, 향후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리스트 장관은 특히 45세 이상 연령층에서 사망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AFP는 프랑스 6천700만 인구 중 폭염 적색경보 영향에 있는 사람을 4천400만명으로 추산했다.
대규모 정전, 사업장 단축 운영 등 피해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3일 프랑스 북서부 변전소가 과열로 가동을 멈추면서 6만8천 가구의 전력이 끊겼다.
또 무더위로 원자로 냉각수 공급이 제한되면서 원자력 발전량을 한낮 총 전력 수요의 7%인 4.1GW(기가와트) 줄이면서, 유럽 각지에 전력을 수출하는 순수출국 프랑스의 전력 수출량이 급감했다.
에펠탑은 조기 폐장을 발표했고, 영국 런던의 버킹엄궁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근위병 교대 행사를 축소하기도 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프랑스의 한 자동차 공장에서 작업장 내부의 온도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치솟았다며 노조 지도부가 파업을 촉구했다고 전했다.
열돔이 오메가 모양으로 유럽을 에워싼 이번 폭염은 7월까지도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 '31만원 에어컨' 소식에 경찰까지 출동?…난장판 된 마트
기록적인 폭염에 냉방기기 품귀 현상도 벌어졌다.
대형 유통업체 까르푸는 지난달 22일 하루에만 선풍기와 에어컨 약 3만 대를 판매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의 지난주 프랑스 내 냉방기기 판매량은 작년 동기보다 2배 늘었다.
AFP 통신, 뱅미뉘트에 따르면 지난 2일(현지시간)에는 에어컨과 선풍기를 대량 싸게 판매한다는 소식에 프랑스의 한 매장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리며 난장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할인마트 리들이 최소 수백 유로에 달하는 에어컨을 단 179유로(31만 원)에 살 수 있는 행사를 연 건데, 매장마다 엄청난 인파가 몰리면서 에어컨을 차지하기 위해 몸싸움과 고성이 오가며 아수라장이 됐다.
일부 매장 앞에서는 새치기하려는 이들 때문에 다툼이 벌어져 경찰이 출동했다.
그동안 에어컨은 프랑스에서 인기가 별로 없는 가전제품 중 하나였다.
소음이 심하고 오래된 건축물의 외관을 훼손하며 에어컨을 가동할 만큼 날씨가 덥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에너지 소비가 심한 냉방 기술이 빠르게 보급되면 유럽의 기후 변화 대응 주도권이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4가구 중 1가구만 에어컨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달 발표된 입소스 여론조사에서도 프랑스인의 78%는 에어컨이 환경에 해롭다고 답했으며, 응답자 6명 중 1명은 지구를 위해 불편을 감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폭염이 의료 체계는 물론 경제에도 심각한 부담을 주기 시작하면서 이제 '에어컨은 불필요하다'는 기존 인식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유럽의 기온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에어컨에 대한 유럽인의 저항은 현실과 충돌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 이런데도 에어컨 없는 파리?…정치 갈등까지
프랑스는 오래된 건물과 공동주택이 많아 실외기 설치에 제약이 있어 에어컨 설치가 까다롭다.
특히 수백년 된 역사적 건축물이 많은 파리의 경우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건물 외벽에 에어컨 실외기 설치를 금지하는 규제도 있다.
설치가 가능한 건물이더라도 문화재 보호 규정과 경관 심의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에 정치권에선 관련 논쟁이 벌어졌다.
프랑스 대표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은 “사람들이 폭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있다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며 “만약 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가장 취약한 계층이 있는 병원, 요양원, 학교부터 대규모 냉방 시설을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또 에어컨을 공중보건 문제로 규정하고, 현 정부와 좌파 진영이 냉방시설 확대를 이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모나크 바르뷔 프랑스 기후부 장관은 "에어컨 설치가 산불을 막아주나? 농작물 피해를 막아줄 것이라 생각하나?"며 부정적 입장을 표했다.
오드리 풀바르 파리 부시장도 "우리의 목표는 소음이 심하고 열과 가스를 내뿜는 에어컨이 벽면 전체에 설치된 이탈리아, 브라질, 미국의 도시들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좌파 진영의 장뤼크 멜랑숑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 대표 역시 “모든 곳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은 (탄소 배출에 따른) 피해를 가중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녹색당과 극좌 굴복하지않는프랑스 의원들은 폭염 대응에 실패한 책임을 묻겠다며 하원에 정부 불신임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 美 "더위도 못 견뎌?" 조롱에…프랑스 "폭염에 美 책임 있어"
폭염으로 골머리를 앓는 프랑스를 향해 최근 온라인에서는 미국인들, 특히 미국 남부 사막지대나 열대성 기후 지역에 사는 이들 사이에서 자신들은 매년 겪는 더위조차 견디지 못한다는 식의 조롱이 이어졌다.
이에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오드리 풀바르 파리시 국제관계 담당 부시장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프랑스를 덮친 기록적인 폭염이 미국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풀바르 부시장은 "미국 언론인과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 중 일부는 파리의 모든 방에 에어컨이 설치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파리를 비판하고 조롱해 왔다"며 "정말 어이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국가로서 여러분은 지구 온난화와 그로 인해 프랑스가 겪고 있는 피해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며 "에어컨 보급률이 90%에 달하는 여러분의 도시들도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우리는 지난 25년간 대기오염을 줄이고 도시 녹지를 늘리며 건물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교통 체계를 바꾸기 위한 정책을 시행해 왔다"면서 "미국의 모든 도시가 파리나 다른 유럽 도시들처럼 같은 수준의 생태 전환 노력을 기울였다면 세계는 더 나아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기록적 폭염에 홀로 웃는 中?…에어컨 수입 '폭증'
기록적 폭염이 국가 간 갈등으로까지 번진 가운데, 뜻밖의 수혜를 본 나라가 있다.
프랑스의 까다로운 에어컨 설치 규제를 피할 수 있는 '중국산 이동식 에어컨'의 수요가 폭증한 것이다.
지난달 30일 홍콩 성도일보는 프랑스의 냉매 관련 규정 때문에 일반적인 에어컨 제품을 들여놓기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산 이동식 제품들이 급부상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미켈란젤로의 작품 '아담의 창조'를 패러디해 중국산 이동식 에어컨을 신이 내려준 것처럼 묘사하는 영상이 온라인에서 확산하고 있다고도 소개했다.
중국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에 따르면 프랑스 등 서유럽 시장에서 중국 메이디의 에어컨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70% 넘게 증가했다.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메이디 측은 24시간 내내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중국 경제매체 이차이는 또 다른 중국 가전 업체인 그리전기 역시 1∼6월 유럽 지역에서 에어컨 판매가 전년 동기 대비 40% 넘게 늘었으며 글로벌 유통업체들이 보유한 재고가 바닥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동식 에어컨뿐만 아니라 햇빛 가리개용 모자, 휴대용 선풍기, 냉감 이불 등 다양한 중국산 냉방 제품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중국'은 이번 폭염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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