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동안 성범죄 목적을 완강히 부인해 온 장윤기가 법정에서 '강간 등 살인'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검찰이 보완수사로 확보한 차량 블랙박스 영상 등 명백한 증거를 들이밀자 기존 주장을 꺾은 것이다.
자백으로 범행의 성격은 분명해졌지만, 법정 안팎의 쟁점은 오히려 넓어졌다. 뒤늦은 태도 전환을 둘러싼 양형 공방부터 경찰의 조직적 은폐 의혹 수사, 그리고 검찰 보완수사권과 '친족 특례'를 둘러싼 제도적 논쟁까지 과제가 첩첩산중이다.
■ 성폭행 목적 없었다더니…'블랙박스'에 무릎 꿇었다
장윤기는 13일 광주지법에서 열린 두 번째 공판에서 검찰이 적용한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첫 공판까지만 해도 "자살을 결심하고 누군가를 함께 데려가려 했을 뿐, 성폭행 목적은 없었다"며 우발적 범행을 주장했으나 사흘 전 법원에 혐의 인정 의견서를 낸 데 이어 법정에서도 기존 입장을 뒤집었다.
불리한 증거가 쏟아진 상황에서 성범죄 목적만 다투는 실익이 없다고 판단해, 공소사실을 인정한 뒤 양형 단계에서 실리를 챙기겠다는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날 법정에서 공개된 영상 등 검찰의 증거들은 치밀한 계획범죄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윤기는 당초 자신을 스토킹으로 신고한 직장 동료 여성을 장시간 찾아다니다 발견하지 못하자, 귀가하던 이채원 양을 발견하고 차량으로 뒤따라갔다. 이어 폐쇄회로(CCTV)가 없는 사각지대에 차를 세워 기다리다 피해자를 납치하려 했고, 저항하자 준비한 흉기를 휘둘렀다.
여기에 차량 뒷좌석 문을 미리 열어둔 점, 피해자의 목덜미를 잡아 강제로 이동시키려 한 정황, 차량에서 발견된 공업용 케이블타이는 성범죄 목적을 명백히 뒷받침했다.
결정적으로 압수된 장윤기의 원룸에서 목과 가슴 부위가 잔혹하게 훼손된 성인용품이 발견되었고, 과거 외국인 여성을 감금·성폭행할 당시 목을 졸랐던 수법까지 확인되면서 법조계에서는 여러 간접증거가 완벽하게 맞물려 피고인의 계획성을 증명했다고 보고 있다.
■ 두 달 버티다 돌연 자백…유족 "감형 노린 꼼수"
장윤기가 범행을 자백함에 따라 재판의 무게추는 형량 판단으로 완전히 이동했다. '강간 등 살인'죄의 법정형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으로, 유죄 인정 시 법원이 유기징역을 선택할 수 없는 중범죄다. 장윤기 측이 재판 과정에서 작량감경(법관의 재량 감형)을 받아내기 위해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윤기가 법원에 제출한 10여 쪽 분량의 반성문은 곧바로 거센 양형 공방의 중심에 섰다. 반성문에는 "뒷생각 없이 무책임한 생각으로 피해자를 해쳐 일상을 앗아갔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유족 법률대리인 김문석 변호사는 "진정한 반성이 아닌 감형을 노린 꼼수"라고 강력히 반박했다. 성적인 목적에 대한 진정한 인정이나 피해자·유족을 향한 진심 어린 사죄 대신,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사과와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표현으로 은연중에 우발성을 강조했던 기존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장윤기가 수용 생활 중 자격증을 취득하고 싶다는 취지의 자필 의견서까지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자 유족들은 "피해자의 시간은 영원히 멈췄는데, 피고인은 교도소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법조계 역시 수사 초기부터 자백한 것이 아니라 명백한 영상 증거를 본 뒤에야 말을 바꾼 만큼, 재판부가 이를 진정한 반성이 아닌 궁박한 방어 전략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 경찰 수사 다시 도마…'조직적 은폐 의혹' 밝히나
장윤기의 자백은 거꾸로 경찰의 초기 수사를 매서운 검증대 위에 올렸다. 살인과 살인미수 혐의만 적용해 사건을 넘겼던 경찰과 달리, 검찰은 보완수사 끝에 강간살인 혐의를 밝혀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찰 수사 실무진은 당초 강간살인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보고했으나, 광산경찰서장 등 지휘부 윗선이 이를 제동 걸었다는 내부 진술이 나오며 '조직적 축소 의혹'으로 번졌다.
더 큰 파문은 장윤기의 아버지가 현직 장모 경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작됐다. 검찰이 장 경감의 휴대전화에서 확보한 녹취록에는 동료 경찰관들이 "아버지가 경찰인 사실을 외부에 모르게 하라"고 모의한 정황이 담겼고, 장윤기의 과거 스토킹 범죄 수사 정보까지 사전에 유출된 정황이 드러났다.
사라진 증거들의 행방도 충격적이다. 장 경감은 사건 직후 연가와 병가를 연달아 내고 아들의 원룸에 들어가 성인용품을 조각내 여러 지역에 분산 폐기했고, 과거 휴대전화마저 불태웠다.
경찰 역시 범행 도구로 의심되는 케이블타이를 차량 수색 영상으로 확인하고도 압수하지 않은 채 장 경감에게 차량을 돌려줬으며 관련 채증 영상마저 삭제했다. 이 케이블타이는 두 달 뒤 검찰의 압수수색을 통해 장 경감의 집에서 발견됐다.
심지어 피해자 이 양이 범행 당시 입었던 옷은 유족 동의도 없이 폐기되었고, 신었던 운동화 등 마지막 유류품은 행방불명된 상태다.
현재 수사팀장은 구속됐고 광산경찰서장을 포함한 지휘부 등 6명이 직무 배제되어 특별수사단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있다., 향후 '경찰 라인' 어디까지 공범으로 엮일지가 핵심 관전 포인트다.
■ 보완수사권·친족특례 논란까지…사법제도 시험대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한 개인의 강력범죄를 넘어 대한민국 사법 제도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대대적인 입법 논쟁을 촉발했다.
첫 번째 도마에 오른 것은 야권이 추진 중인 '검사의 직접 보완수사권 폐지' 법안이다.
수사와 기소 분리를 기치로 검사의 직접 보완수사를 없애고 경찰에 재수사를 요구하는 방식만 남기겠다는 형소법 개정안이 이번 사건에 적용됐다면, 최초 수사팀이 조직적으로 묵인하고 숨긴 '강간살인'의 전모를 검찰이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게 법조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10일이라는 짧은 구속 기한 내에 경찰의 재수사 결과만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경찰직협 등은 하나의 사건을 보완수사권 존치의 근거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고 맞서지만, 최초 수사기관이 증거를 누락하거나 은폐했을 때 이를 견제하고 직접 확인할 수단마저 빼앗는다면 결국 그 피해는 국민과 범죄 피해자에게 돌아간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현직 경찰관 아버지가 아들의 범죄 증거를 인멸했음에도 처벌하기 어려운 형법상 '친족 특례(형법 제155조 4항)' 조항이다. 가족에게 범죄자를 고발하거나 증거를 보존하도록 법적으로 강요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1953년 제정된 제도다.
그러나 장 경감의 경우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증거의 가치와 수사 절차를 완벽히 숙지하고 있는 현직 고위 경찰 공무원이었으며, 동료 경찰들과의 카르텔을 통해 증거에 손쉽게 접근해 인멸했다는 점에서 비판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에 정치권과 법조계 일각에서는 공무원이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이나 권한을 남용해 친족의 증거를 인멸한 경우 특례 적용을 배제하는 '장윤기 방지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장윤기의 자백으로 성범죄 목적을 둘러싼 법적 다툼은 일단락되었지만, 이번 사건이 사법 시스템에 남긴 과제는 여전히 묵직하다. 논쟁의 본질은 수사기관 간의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한 수사기관이 시스템 내부의 비위로 심각한 오판을 내렸을 때, 이를 독립적으로 바로잡을 교정 장치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있다.
피고인의 뻔뻔한 자백에 대한 법정의 준엄한 심판, 그리고 제도적 사각지대를 메우기 위한 입법부의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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