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뉴스7

"칠회칠배" 이견만 확인했던 역대 영수회담…성과 없어도 '정국 전환 빅이벤트'

등록 2024.04.27 19:09

수정 2024.04.27 19:15

[앵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시작된 영수회담은 그동안 25차례 넘게 이뤄졌지만 대부분 입장차만 확인한 채 빈손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정치 이벤트보다 의미가 큰 만남이라, 정치사의 굵직한 변곡점으로 이어진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역대 영수회담이 정계 구도를 어떻게 바꿨는지, 윤동빈 기자가 알아봤습니다.
 

 

[리포트]
영수회담은 통상 대통령이 정치적 난국을 풀기 위한 목적으로 열렸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청와대를 찾은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구체적 답변을 피했지만,

대한뉴스 (1987년 6월 27일)
"전두환 대통령은 '김 총재가 개헌문제에 정치력을 발휘해서 국회에서 합의개헌을 이룩해 민주주의의 좋은 작품을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불과 일주일 뒤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며 오늘날의 대통령 직선제가 정착됐습니다.

전두환 / 前 대통령 (1987년 6월 30일)
"새로운 헌법에 따라서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노태우 대통령이 김대중, 김종필 두 야당 총재와 연쇄 회담을 한 뒤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해 보수정당의 뿌리가 됐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과 이기택 민주당 대표는 방북을 논의하다 서로 반말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7차례나 만났지만, 이 총재 측에서는 일곱 번 만나 일곱 번 배신당했다는 '칠회칠배'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뒤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회창 / 前 한나라당 총재 (2001년)
"민심도 춥고 경제도 춥고, 오늘은 좀 추운 목소리 좀 들려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두 사람의 의약분업 합의는 영수회담의 성공적인 결과물로 꼽힙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양자 영수회담을 한 차례도 하지 않았습니다.

TV조선 윤동빈입니다. 

Copyrights ⓒ TV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