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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안희정의 걸음

등록 2018.03.06 21:45

수정 2018.03.06 21:52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고교 교과서에 실린 '청춘예찬' 첫 대목,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겁니다. 이 수필을 쓴 민태원의 호가 우보(牛步)였지요. 소처럼 행동이 굼떠 주변에서 놀리던 별명을 호로 삼았다는데 아마도 소 걸음의 미덕이 좋아서였겠지요.

소는 느리되 부지런하고, 유순하되 뚝심이 있는 동물입니다.. "드문드문 걸어도 황소 걸음"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큰 사람이 하는 일은 당장은 속도가 느려도, 멀리 크게 가며 속이 알차다는 얘깁니다.

성폭행 논란을 빚고 있는 안희정 충남지사가 비서 김지은씨와 주고받은 메시지에서 우보라는 호칭이 눈에 띕니다. 김씨가 안 지사를 ‘우보 지사님’으로 등록해 놓았는데, 안 지사가 즐겨 썼던 말 우보호시(牛步虎視)에서 따 왔다고 합니다.

호랑이처럼 예리한 눈빛을 하고서 소처럼 착실하게 가겠다는 다짐이었을 겁니다. 안 지사는 지난 대선을 전후해 단숨에 대권 주자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거친 구호 대신 유연한 시각으로 합리적 보수층의 지지까지 끌어당겨 '안희정 현상'이란 말도 나왔지요.

얼마 전엔 선거 불출마를 선언해 여당 대표에 도전할 거라는 예상이 나왔습니다. 모든 행보가 다 다음 대선을 향한 큰 그림으로 읽혔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그림이 물거품이 됐습니다. 겉으론 우보를 말하면서 어두운 뒤안길에선 진중한 소의 행보를 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최인호 소설 '상도'에 계영배라는 술잔이 나옵니다.

7할 넘게 술을 부으면 흘러내려가게 만든 잔입니다. 큰 상인 임상옥은 이 잔을 곁에 두고 끝없이 치솟는 소유욕을 다스렸습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수신(修身) 역시 이 계영배의 교훈 처럼 마음과 행실을 가다듬어 욕구를 통제하라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유력 대선주자로까지 거론되던 한 정치인의 몰락을 보면서 우리가 혹시 몸가짐을 소홀히 하는 수신 부재의 시대, 그 한가운데 있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3월 6일 앵커의 시선은 '안희정의 걸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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