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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앵커의 시선] 97세 어머니의 생명찬가

등록 2020.03.27 21:48

수정 2020.03.27 21:52

덕수궁 석어당은, 인목대비가 어린 아들 영창대군 잃은 한을 품고 갇혀 살던 곳입니다. 그 석어당 앞 4백 살 살구나무 거목이 올해도 어김없이 연분홍 화사한 꽃을 가득 피웠습니다. 하지만 시인에겐 봄보다 환한 것이 있습니다.

"보리밭 건너오는 봄바람이 더 환하냐. 징검다리 건너오는 시냇물이 더 환하냐… 혼자 핀 살구나무 꽃그늘이 더 환하냐… 아니다, 엄마 목소리 그 목소리 더 환하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시인은 봉숭아를 볼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시인이 쉰 살 되도록 어머니는 아들의 새끼손가락에 부적처럼 봉숭아 물을 들여주셨습니다.

"꽃보다 붉은 그 노을이, 아들 몸에 지필지도 모르는, 사악한 것들을 물리쳐준다고… 무덤에 누워서도 자식 걱정에 마른 풀이 자라는 어머니…" 청도에 사는 아흔일곱 살 황영주 할머니가 코로나 치료 열이틀 만에 완치됐다고 합니다. 지난주 퇴원한 경산 할머니보다 네 살 많은 최고령 완치 기록입니다.

가족에게 돌아온 어머니는 칠순의 아들부터 챙겼습니다. "아들이 많이 놀라고 걱정하게 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가끔 않는 감기라 생각했고, 아들한테도 감기다, 감기다 하고 안심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족과는 마지막이구나 했는데 다시 아들을 만나 말할 수 없이 좋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코로나의 마수를 떨쳐낸 힘은 분명 자식 사랑, 자식 걱정에서 나왔을 겁니다. 그 힘은 코로나와 싸우는 많은 분들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어주겠지요.

한편으로 저는, 고령의 코로나 희생자를 발표할 때마다 따라붙던 단어, 기저질환을 되새겨봅니다. 그 말 뒤에 건강한 사람은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 숨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질환이 있는 분이나 고령 노인의 생명의 가치가 젊은이보다 못하다는 얘기로 들리지나 않을까 꺼림칙했습니다.

지금은 의술이 발달하고 지병을 잘 관리해 품고 사는 세상입니다. 고령 희생자 중에는 코로나 아니었으면 훨씬 더 오래 사셨을 분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백살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승리는 당당한 항변으로 들립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가족' 이라고 말입니다. 3월 27일 앵커의 시선은 '97세 어머니의 생명찬가'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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