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전체

[아테네 이야기] 페리클레스에게 배우는 '김건희 특검' 해법

등록 2023.02.15 09:19

수정 2023.02.21 08:12

아크로폴리스 아래, 시끌벅적한 플라카와 모나스트라키가 관광객의 동네라면, 공원 하나를 경계로 백화점을 필두로 밥벌이를 하는 생활인의 영역이 펼쳐진다. 거기서 만나는 곳이 우선 아테네 학술원이다. 학술원이라는 이름이 이곳만큼 잘 어울리는 곳도 없다. 학술원의 어원이 된 ‘아카데미’가 원래는 이 근처를 뜻하는 지명이었던 탓이다. 플라톤이 학교를 지었던 동네다. 학술원에 걸맞게 건물 입구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동상이 장식하고 있어 관광객들에게는 사진을 찍는 명소가 되기도 한다.

학술원 옆에 아테네 국립대학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처마 밑에 벽화가 보인다. 전면에 각 전공과목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그려진 그림이 먼저 눈에 띈다.

 

[아테네 이야기] 페리클레스에게 배우는 '김건희 특검' 해법
아테네학술원. 보기에 왼쪽에 플라톤, 오른쪽에 소크라테스가 앉아서 방문객을 맞이한다. 멀리 기둥 위에선 보기에 왼쪽에 아테나 여신, 오른쪽에 아폴론 신이 지혜의 전당을 지키고 선 모습이다.


 

[아테네 이야기] 페리클레스에게 배우는 '김건희 특검' 해법
아테네 국립대학의 전면 벽화. 인물마다 하나씩의 학문을 상징한다.

기둥들 뒤에 숨어 있어 한 눈에 다 보이지 않는 그림이 또 있다. 이방인에게 다행스럽게도 그림 속 인물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도록 머리 위에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페리클레스다.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권력자다. 매년 선출되는 ‘장군’ 직에 15년 연속 뽑히기도 했고, 직위와 관계없이 권력을 휘두른 기간은 대략 20년이 넘는다. 아테네는 물론 세계 문화유산의 상징이 된 파르테논 신전이 바로 페리클레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건축물이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사람은 최고 권력자 페리클레스의 어깨에 팔을 턱 하니 걸쳐놓고 있는 여인이다. 머리 위에 적힌 이름, 아스파시아다. 아스파시아는 고급 매춘부(헤타이라)였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고급 룸살롱 마담쯤 되려나. “아스파시아는 창녀들을 집안에 두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한다. 하지만 아스파시아는 단지 젊음과 미모만 파는 여인이 아니었다. 지식과 재치를 파는 여성이었다. 오죽하면 소크라테스가 아스파시아에게서 수사학을 배웠다는 말까지 있다. 꼭 철학 얘기만 했을까 싶기는 하지만, 실제로 소크라테스도 친구들과 함께 아스파시아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페리클레스도 아스파시아의 정치적 식견에 반했다.

 

[아테네 이야기] 페리클레스에게 배우는 '김건희 특검' 해법
아테네 국립대학의 벽화. 사진 왼쪽부터 소크라테스, 페이디아스, 소포클레스, 아스파시아다. 투구를 쓰고 의자에 앉은 사람이 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다른 손으로 페리클레스의 팔을 잡고 있는 사람이 아스파시아, 페리클레스보다 더 우람한 가슴과 팔뚝을 자랑하며 뒤에 선 인물은 파르테논 신전 공사 책임자 페이디아스, 페이디아스에 가려진듯 서 있는 사람은 페리클레스와 함께 '장군'의 자격으로 사모스 원정에 참여했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 맨발로 홀로 동떨어진듯 앉아 있는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플라톤이 지은 <메넥세노스>에는 소크라테스와 아스파시아가 기억력 대결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도 연설을 아스파시아가 써줬다고 주장한다. “내가 바칠 것은 피와 땀과 눈물뿐”이라고 한 윈스턴 처칠이나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고 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명연설이 바로 페리클레스의 추도 연설에서 착안된 것이다. 그 명연설이 실은 페리클레스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아스파시아가 불러준 대로 받아쓴 것이었다니!

아스파시아를 만났을 때 페리클레스는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하지만 혼자였다. 귀족 여인과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지만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 페리클레스는 곧 아스파시아와 함께 살았다. 법적으로 결혼을 했는지, 그래서 아스파시아가 ‘아내’라는 지위를 획득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어떻든 페리클레스는 매일 출근할 때마다, 또 퇴근할 때마다 아스파시아를 꼭 껴안고 입을 맞췄다. 현대에도 가부장 문화가 뿌리 깊은 그리스에서, 고대에 여인에게 대놓고 하는 애정 표현은 남사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놀랄만한 사랑’이라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한다.

귀족 출신이었던 페리클레스는 훗날의 민주정치 지도자들과는 사뭇 다른 생활을 했다. 공적인 일로 사무실에 나가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친구들의 식사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촌의 결혼식에도 잠깐 얼굴만 비치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하게 사람을 사귀다 보면 강직한 태도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도자는 은둔형인데 배우자(또는 동거녀, 애첩)는 온갖 사람을 다 만나며 정치와 철학을 논하고 다니니 당연히 뒷말이 많았다. 당대의 그리스 여성들은 집에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리스는 지금도 장보기를 남자들의 일로 여긴다. 과거에는 더욱 심해서 여인들은 바깥출입 자체가 금기시됐다. 페리클레스 자신도 “여인들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말했다. 가뜩이나 외국인이라서 꺼려지고, 매춘부라 혐오의 대상인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활발하게 남자들과 어울리는 아스파시아의 모습은 아테네를 떠들썩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현대보다 훨씬 자유롭게 정치인들을 향해 독설을 쏟아내던 당대의 희극작가들은 헤라클레스를 노예처럼 부려먹은 옴팔레 여왕에 빗대 아스파시아를 비판했다.

서기전 440년 아테네의 속국(명목상으로는 동맹국)이었던 사모스 섬이 반란을 일으켰다. 사모스 섬의 저항은 끈질겨서 원정은 아홉 달 동안이나 이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오래 끄는 전쟁은 패전보다 더 인기가 없다. 시민과 군인의 경계가 없는 아테네에서는 더욱 그랬다. 사람들은 사모스와의 전쟁이 아스파시아 때문에 벌어졌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 무렵 페리클레스와 아스파시아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태어났다.

사모스 섬의 반란은 섬나라인 사모스와 해안국가인 밀레토스와의 다툼이 첫 단초였다. 아테네가 두 나라의 싸움을 중재했는데, 사모스가 중재를 거부했고,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가 바로 이 밀레토스 출신일 정도로, 아테네가 패권을 잡기 전까지 밀레토스는 지중해 세계의 문명을 주도하는 땅이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이미 쇠퇴해 있었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아서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잇달았는데, 아스파시아도 그렇게 밀레토스를 떠나온 사람 중 하나였다. 싫어하는 사람들 눈에 페리클레스는 ‘애첩 기분 좋으라고 국민들 죽어나가는 전쟁을 벌이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모스 섬은 지금도 배편으로 아테네를 출발해 터키로 갈 때 경유지로 들를 만큼 교통의 요지다. 밀레토스에 탈레스가 있다면, 사모스는 피타고라스를 낳은 에게해의 강자이기도 했다. 페리클레스 당시에는 아테네의 영향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약 30년 후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졌을 때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은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우방국이 된다. 심지어 아테네에서 잠시나마 민주주의가 무너졌을 때 민주정치를 복원시킨 것도 사모스섬에 주둔하던 해군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막바지에 결정적인 전투(해전)들도 사모스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치러진다. 페리클레스가 정말로 아스파시아의 베갯머리 송사를 들어주느라 사모스 전쟁을 벌였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이유가 뭐가 됐든 사모스 섬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해 둔 조치는 전략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테네 이야기] 페리클레스에게 배우는 '김건희 특검' 해법
아스파시아. 아테네 국립대학의 뒷길에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앙다문 입술과 턱이 위엄을 지키고 있지만, 비교적 최근에 코가 파손된 채 방치돼 있다. 아스파시아는 아직도 아테네인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테네 이야기] 페리클레스에게 배우는 '김건희 특검' 해법
피타고라스. 이탈리아 크로톤에서 활동했지만, 원래 사모스 출신이다. 지금은 '피라고라스의 정리'를 만든 수학자로 기억되지만, 당대에는 참주정을 피해 자신만의 정치 공동체를 이룬 인물로 유명했다.

사모스 전쟁 2년 후 아스파시아는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매춘부가 아닌 일반 여성을 페리클레스에게 성적 대상으로 공급한 혐의라는 얘기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설득력도 떨어진다. 정확하게 뭘 잘못해서 불경죄인지는 알려져 있지않다. 비슷한 시기에 고발당한 페리클레스의 최측근이자 파르테논 신전의 공사책임자인 페이디아스의 혐의가 소상하게 전해지는 것과 비교된다. 그냥 외국인이 아테네에서 ‘인싸’ 노릇하는 꼴을 보기 싫었던 심정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도무지 약점이 없는 페리클레스를 괴롭히는 방법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선택된 결과이기도 했다. 의도가 페리클레스 괴롭히기였다면, 성공했다. 페리클레스는 재판정에 나가 눈물로 호소해 아스파시아의 무죄 방면을 이끌어냈다. 고대 아테네의 재판은 말 그대로 여론재판이었다. 사실이 무엇이든 배심원들의 마음만 얻으면 됐다. 최고 권력자의 애첩을 감옥에 보내 최고 권력자의 눈물을 보고 싶었던 배심원들에게, 최고 권력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눈물을 보여줌으로써 애첩을 지킬 수 있었다.

아스파시아를 둘러싼 소문과 의혹의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소문이 번질 수 있도록 하는 정황은 있다. 아스파시아가 실제로 페리클레스에게 여염집 여인을 잠자리 상대로 제공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스파시아 본인이 과거 매춘부를 공급하는 일을 했던 건 사실이었다. 아스파시아가 실제로 페리클레스에게 연설문을 써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페리클레스의 연설문을 통째로 외울 만큼 영특했던 건 사실이었다. 아스파시아가 실제로 사모스 전쟁을 사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모스의 적국인 밀레토스 출신인 건 사실이었다. 페리클레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정도의 사실은 충분히 고발의 소재가 되고도 남았다.

최소한의 정황을 의혹으로 만드는 건 정치적 반대파의 일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그 의혹을 사실로 받아들일지 여부는 권력자 자신이 하기 나름이다. 배심원단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처음부터 아스파시아가 아니라 페리클레스의 몫이었다. 배우자의 일이라고 뒷짐지거나 숨지 않았다. 어차피 아스파시아가 공격받는 이유는 페리클레스의 애첩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아스파시아가 아니라 페리클레스다.

페리클레스가 무죄 판결을 받아다주긴 했지만, 아테네인들이 아스파시아를 용서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아테네에서 피레우스로 가는 도로 공사를 하던 중 이런저런 유물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아스파시아를 저주하는 서판도 있었다. 몇백년 후의 기록이지만, 아스파시아의 무덤이 피레우스 항구에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스파시아가 아테네 시민들의 미움을 받았고, 결국 아테네 시내에서 살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페리클레스가 아스파시아에게 무죄 판결을 받아다줬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아스파시아가 아닌 페리클레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려줬던 셈이다.

권력자의 배우자는 늘 관심의 대상이다. 민주정치가 작동할 때는 더욱 그렇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는 선거 때부터 이른바 ‘줄리’ 의혹에 시달리더니 허위 이력, 논문 표절 논란에 이어 주가 조작 사건으로 특검을 요구받는 상황에 내몰렸다. 김건희 여사의 통장으로 이뤄진 주식 거래 대부분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고, 아직 공소시효가 남은 거래가 있다 한들 시세조종을 공모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심지어 작전세력과 공모해 주가조작에 사용된 돈을 제공한 이른바 전주(錢主)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특검을 한다 한들 사법적으로 처벌하기 힘들다는 사실이 판결문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민주당은 "김건희 특검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며 굽히지 않는다. 밀레토스 출신이라는 사실 말고는 아무런 증거가 없더라도 아스파시아는 '남편을 꼬드겨 전쟁을 사주한 여자'로 둔갑했다. 김건희 여사가 도이치모터스 주식을 거래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가조작 논란은 끈질지게 이어지게 돼 있다. 어차피 김건희 여사의 유죄 여부가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검으로 윤석열 대통령에게 상처를 입히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권력자의 배우자로 말하면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드루킹의 ‘경인선’을 각별히 챙기는듯한 영상으로 시선을 한몸에 받은 적이 있는 김정숙 여사는 해외순방에 나설 때 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통령보다 더 주목받고는 했다. 급기야 문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에도 김 여사의 옷값이 궁금하다며 특검을 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시민단체가 김정숙 여사 의전 비용을 포함한 특수활동비 사용 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법원도 공개하라고 판결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항소한 상태에서 임기를 마쳐 의상 비용을 공개가 불가능한 대통령기록물로 만들어버렸다. 민주당이 '김건희 특검'을 주장하면,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은 '김정숙 특검'으로 맞불을 놓는다. 논쟁은 평행선을 달리고, 접점을 찾지 못한다. '우리편'이 뭔가 꼬투리를 잡히면 '너네도 그랬잖아'로 맞선다. 잘해봤자 '다 똑같은 놈들'이 되는 게 고작이다.

좀더 '나은' 사람이 되는 전략을 써보면 어떨까. 배우자 의혹에 철저히 침묵했던 문 전 대통령과 달리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 의혹을 직접 해명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선거 과정이었다. 재임 중에 침묵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하긴 지금은 법원 판결이 나와도 소용없는 상황이니 윤 대통령이 직접 해명한다고 해서 특검 주장이 사그러들 성 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미 지난 일은 몰라도 적어도 대통령 재임 중에는 배우자 주변의 잡음은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보여주면 어떨까. 특별감찰관 임명이 좋은 방법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통령 배우자와 친·인척, 측근들의 비리를 상시 감시할 수 있는 기구인 특별감찰관을 한 번도 임명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특별감찰관을 임명해 측근 비리 엄단 의지를 보인다면, 선거 과정에서나 쟁점이 될 법한 배우자의 과거 의혹은 더이상 쟁점이 될 수 없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법정에서 흘린 눈물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법정의 배심원이기도 한 아테네 시민들은 아스파시아의 불경죄 재판이 사법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판단의 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테네는 아스파시아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페리클레스를 정치적으로 재신임했다. 페리클레스가 경쟁자들보다 '더 나은' 지도자라는 판단을 내린 결과다. 권력자의 배우자를 둘러싼 의혹이란, 결국 권력자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달린 문제인 듯하다.


 

[아테네 이야기] 페리클레스에게 배우는 '김건희 특검' 해법
 

Copyrights ⓒ TV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보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