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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Talk] "'고아' 입양서류에 가족과 생이별"…해외입양인들의 이유있는 분노

등록 2023.05.12 18:52

수정 2023.05.12 19:27

1975년 덴마크로 입양을 떠났던 갓난 아기가 중년의 교수가 돼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꼬박 48년 만이었다.

 

[취재후 Talk] ''고아' 입양서류에 가족과 생이별'…해외입양인들의 이유있는 분노
48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바 호프만 씨(오른쪽)과 박요한 씨(왼쪽)


●해외입양 후 '생이별'…엉터리 입양서류 때문

"아침에 공항에서 픽업해오는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나님은 참 묘하시구나, 4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애도 있고. 그것도 제 발로 스스로…."

덴마크 입양인 이바 호프만(48) 씨의 오빠 박요한(61) 씨는 감상에 젖어 말했다. 그는 동생의 출생과 입양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아이 쪽에서 한국의 부모라든가 가족 정보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이가 교육 잘 받고 잘 성장해서 반드시 아이가 고향을 찾을 터인데 그때 되면 돌아온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어려운 형편에 갓 출산한 다섯째 아이의 해외 입양을 망설이던 어머니를, 한국 입양기관은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집을 비우고 지방에서 막노동을 하는 중이었다. 아이 쪽과 연락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입양기관의 말을 믿고 어머니는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떠나보낸 아기가 가족의 품에 돌아오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2008년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에야 딸과 재회했다. 이들의 재회를 가로막은 건 입양 당시 작성된 '엉터리 서류' 때문이었다.

●호적에 등재된 아기가 입양서류엔 '고아'로 둔갑

 

[취재후 Talk] ''고아' 입양서류에 가족과 생이별'…해외입양인들의 이유있는 분노
이바 호프만 씨의 고아호적(위)과 한국 호적


"제 입양 서류에 '고아'라고 기재돼 있었어요. 부모 모두 없다고…그래서 살면서 친생 가족을 찾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이바 호프만 씨는 입양 서류에 고아 호적이 첨부된 '고아'였다.

하지만 친생 가족들은 이바 호프만 씨의 존재를 잊은 적이 없었다. 입양을 보낸 후에도 매년 입양기관을 찾아 아이의 소식을 물었다. 답은 한결같았다.

"네덜란드로 갔는데 그쪽 입양 기관을 통해 소식이 오면 알려주겠다…."

친생 부모가 없는 고아임을 받아들이며 자란 이바 호프만 씨와 입양기관으로부터 아이가 입양된 국가조차 잘못 전해들은 가족. 양쪽의 거짓된 정보 때문에 연락은 32년간 단절됐다. 박요한 씨와 어머니는 끈질긴 수소문 끝에 우연한 기회와 닿아 2007년에야 떠났던 아이를 찾아냈다.

가족과의 재회를 계기로 자신의 입양 과정을 역추적하기 시작한 이바 호프만 씨는 생년월일과 이름을 제외한 입양 서류상 모든 정보들이 조작된 정황을 파악했다. 예컨대, 가족들에 따르면 이바 호프만 씨는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한 조산원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서류에는 인천시 길바닥에 버려진 채 발견돼 출생 장소가 인천으로 추정된다는 식이다.

최근에는 자신이 한국 호적에도 올라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충격을 받았다. 출생 직후, 오빠 박요한 씨가 부재중이었던 아버지를 대신해 '박정란'을 부모 박금석·김길엽 씨의 호적에 올렸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고아 호적'과 '진짜 호적', 2개의 호적을 가진 이바 호프만 씨.
"한국에 누가 호적을 2개씩 가지고 있나요? 많은 한국인들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뒤바뀐 입양서류에 '남의 가족'과 상봉하기도

서류조작 뿐만 아니라 입양기관의 부실한 서류 관리도 입양인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2011년, 20대의 끝자락에서 친생가족 찾기에 나선 미국 입양인 미케일라 디에츠(41) 씨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입양 서류상 친부모 정보를 토대로 가족과 상봉했다. 4개월 동안 친가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유전자 검사를 진행한 후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관계의 깊이는 서로 알아가는 단계에 있었던 정도였지만 감정적 타격은 굉장히 컸다"고 했다.

 

[취재후 Talk] ''고아' 입양서류에 가족과 생이별'…해외입양인들의 이유있는 분노
'친생 가족'과 상봉했던 미케일라 디에츠 씨. 추후 유전자 검사 결과가 불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입양기관에서는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태어나 같이 고아원으로 보내진 아기 둘의 서류가 바뀌었던 것 같다고 추측만 할 뿐, 다시 친생 가족 찾기에 나서야 했던 미케일라 디에츠 씨를 도와준 일이 없다. 미케일라 디에츠 씨는 다행히 다른 입양 관련 단체의 도움으로 2015년 친생 가족을 찾았다.

비슷한 경험을 했던 미국 입양인 로빈 조이 박(41) 씨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대학 졸업 직후였던 2007년, 친생 가족과 상봉해 6년 가까이 교류했다. 한국 이름 '박주영'의 어머니, 형제, 할머니, 고모, 사촌들까지 만나며 정을 쌓았다. 하지만 뒤늦게 실시한 유전자 검사에서 가족이 아닌 걸로 드러나 서로 큰 상처가 남았다.

 

[취재후 Talk] ''고아' 입양서류에 가족과 생이별'…해외입양인들의 이유있는 분노
'친생 어머니'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로빈 조이 박 씨. 추후 유전자 검사 결과가 불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박주영'의 출생지와 가족 등 입양 서류상 정보는 정확했지만, 자신은 박주영이 아니었던 것이다. 로빈 조이 박 씨는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와 바뀌었거나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입양 서류를 찾고 있다. 그는 "내가 과연 내 고유의 정보와 내 고유의 가족 역사에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입양인 가족 잇는 DNA은행 설립해야"

"내 과거와 화해하고 한국과 한국의 가족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줬어요. 한국의 부모님 뿐만 아니라 형제, 조카 등등 이 모든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온다는 건 정말 멋지고 삶 전체가 새로워지는 일인 것 같아요."
친생 가족과의 재회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바 호프만 씨는 여전히 뿌리 찾기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입양인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의과대학의 유전학 교수로도 재직 중인 이바 호프만 씨는 11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한국 정부 차원으로 입양인 가족 상봉을 위한 DNA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저는 DNA라는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위조된 문서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한국 정부라면 친생가족 찾기를 지원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고 믿습니다."

무연고 입양인들을 제외하고는 상당 수 입양인들이 부실한 입양 서류에 의지해 주먹 구구식으로 가족 찾기에 나서고 있는 현실. 아동권리보장원에 따르면 입양정보공개를 청구한 입양인의 가족 상봉률은 30% 미만(2022년 13.2%, 2021년 5%, 2020년 4%, 2019년 28.3%, 2018년 29.0%)이다.

● 과거-현재-미래의 입양인들을 위해

입양 성사에만 급급해 기록 관리 등 입양 아동의 인권 보장에 철저하지 못했던 입양기관들. "그때 그 어려운 시절엔 다들 그랬다" "입양가서 성공한 사람도 많지 않느냐"며 입양의 어두운 역사를 덮고 넘어가기엔 현재진행형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입양인들이 많다.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해 조사 신청을 접수 받은 해외 입양 과정 인권 침해 사건만 372건에 달한다.

지난해에도 142명의 아동이 해외입양을 떠났다. 앞선 입양인들이 겪은 고통과 피해를 성실하게 돌아보고 현행 입양 제도도 손볼 때다.아동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뒷받침 돼야, 앞으로의 '아름다운 입양'이 이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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