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뉴스9

[신동욱 앵커의 시선] 그래도 이건 안됩니다

등록 2023.12.20 21:50

수정 2023.12.20 21:54

2천5백 년 전 이란의 페르시아 왕궁 페르세폴리스로 들어서는 '만국의 문' 입니다. 반인반수상 라마수가 지키는 문 양쪽 기단 벽에 낙서가 빼곡합니다. 송곳이나 정으로 깊이 새겨 놓아서, 깎아내지도 못한 채 3백 년을 지나옵니다.

1704년 네덜란드 화가를 시작으로 서구 방문객 이름이 2백 스물 둘에 이른다고 합니다. 뉴욕헤럴드 기자였던 탐험가 헨리 스탠리가, 실종된 선교사 리빙스턴을 찾으러 아프리카로 가는 길에 남긴 이름도 있지요. 반미 감정이 드센 이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느라 무덤에서도 편치 않을 것 같습니다.

양산 통도사 들머리 금강송 길 바위들에도 옛 시인, 묵객, 벼슬아치의 이름이 천 8백 개가 넘습니다. 단원 김홍도, 개화파 박영효, 종두법의 지석영, 의암 손병희도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조선시대에는 돈을 받고 이름을 새겨주는 석공들이 성업했다고 하지요.

예나 지금이나 이름 낙서는 '나 여기 다녀갔다'며 존재를 알리고 남기려는 인간 욕구의 산물입니다. 그렇듯 인간은 낙서하는 존재 '호모 그라피티(Homo Graffiti)' 입니다. 심리와 정서, 소원을 드러내는 표현이자 창작, 놀이 그리고 심리적 배설 이라고 하지요. '누구야 사랑해' 같은 외침처럼 말입니다.

'누가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정순아 보고 자퍼서 죽것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모래밭 낙서는 파도에 사라지지만, 금강산 박연폭포와 백두산 장수봉 암벽을 파낸 김일성 부자의 낙서는 끔찍한 폭력입니다. 세계에 끊이지 않는 문화재 낙서 역시 무지하고 상스러운 배설입니다.

경복궁 담장 44미터에 스프레이로 불법 영상공유 사이트를 낙서했던 범인을 잡고 보니 10대 한 쌍 이었습니다. 그런데 '경복궁 담에 사이트를 홍보해주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황당해서 믿기 힘듭니다만, 문화재 낙서가 어떤 짓인지도 모른 채 철없이 벌인 장난이라는 건 다르지 않습니다.

다음 날, 모방 범죄를 저질렀다 자수했던 20대는 게다가 황당무계한 글까지 올렸습니다. "짓궂은 장난을 하고 싶었다. 예술을 한 것이고, 그저 낙서일 뿐" 이라며 죄송하지 않답니다. "낙서에 철자가 틀려 창피하다. 하트를 검은색으로 했으면 좋았겠다"고 품평까지 했지요. 유들유들 약을 올리며 매를 벌고 있습니다. 또 다른 모방범죄를 막기 위해서라도 엄벌이 필요합니다.

관광객 낙서에 몸살을 앓던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은 '디지털 낙서장'을 설치해 톡톡히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 남긴 메시지를 웹사이트에 영구 저장해 이름도 남겨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낙서 욕구를 풀어줄 대안을 궁리해볼 만하죠? 바닷가에 토막말 낙서터라도 만들어주는 건 어떨까요.

12월 20일 앵커의 시선은 '그래도 이건 안됩니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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