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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취재후 Talk] 사라진 문건 vs 사무관 수첩…관가에 뭘 남겼나

등록 2020.10.28 16:14 / 수정 2020.11.1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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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8일, 공정거래위원회 한 사무관이 수첩에 사건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제일모직과 삼성생명이 합병하면서 일부 주식을 처분해야했는데, 얼마나 처분해야 할지를 정하는 것이 이 사무관의 업무였습니다. 그리고 4년 뒤,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은 업무파일을 몰래 삭제합니다. 그것도 일요일 밤에, 또 복원할 수 없도록 꼼꼼히 지워버렸습니다. 수첩과 사라진 문건,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세종시 공정거래위원회 외경


■ "일지를 작성하라"

2015년 10월로 가보겠습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순환출자 고리가 형성됩니다. 공정거래법은 계열사끼리 출자하는 순환출자를 제한합니다. 그래서 공정위는 삼성SDI가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 500만 주, 삼성전기가 소유한 삼성물산 주식 500만 주 등 총 1000만 주를 처분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래야 순환출자 고리가 끊어진다고 결론 내린 겁니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최종 결정권자인 위원장 결재까지 났지만 어쩐 일인지 공식 발표가 자꾸 미뤄집니다.

그러다 갑자기 상황이 달라집니다. 처분 주식수를 재검토하라는 지시가 떨어집니다. 당시 담당과장은 이상한 낌새를 느낍니다. 정상적으로 위원장 결재까지 난 사안을 재검토하라는 것은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일이었죠. 그래서 담당 과장은 사무관에게 지시합니다.

"사건일지를 작성하라."

공정위의 경우 기업 등을 조사하는 기관이다 보니 추후에 제재가 적당했는지 감사원 감사를 받게 되고, 언론의 관심도 집중되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훗날 실무진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상급자의 지시와 사건 경과를 일지로 남기라고 한 것이죠. 담당과장의 직감이 맞았던 걸까요. 최종 공정위의 처분은 삼성SDI가 가진 삼성물산 주식 500만 주만 매각하는 쪽으로 정해집니다. 1000만 주 매각에서 절반으로 쪼그라든 것이죠. 훗날 이 수첩은 삼성 승계 과정의 형사적 책임을 제기하는 데에 결정적 증거로 활용됩니다. 공정위에 청와대 등의 압력이 행사됐다는 구도에서 이 수첩의 역할이 컸던 거죠.

세종시 산업통상자원부 외경


■ "파일을 삭제하라"

2019년 11월, 세종시 어진동의 산업통상자원부로 가보겠습니다. 어느 일요일 밤 11시 24분, 한 사무실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출근한 직원들이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들을 삭제하기 시작합니다. 모두 월성원전 1호기 조기폐쇄와 관련된 파일이었습니다. 감사원이 여기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면서 최근 3년 동안의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자 이런 일을 벌인 겁니다. 담당 국장은 이렇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관련 문서와 이메일, USB를 모두 삭제하라."

이들은 다음 날 오전 1시 16분까지 2시간 가까이 관련 파일 444개를 삭제합니다. 문서를 열어 다른 내용을 덮어쓰기도 했고, 파일명도 일일이 바꾸었고, 그러다 파일이 너무 많아 번거롭자 단순 삭제(shift+delete키)를 눌러 복원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감사원은 디지털포렌식을 통해 파일 324개는 복원했지만 120개는 실패했습니다. "BH(청와대) 협의" 등이 적힌 파일은 끝내 볼 수 없었습니다. 감사원은 이들에 대해 감사를 방해한 혐의로 경징계 이상 처분을 내리도록 산업부 장관에게 요구했습니다.


지난 7일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국정감사에서 의원질의에 답하고 있다. / 조선일보DB

 
■ 공정함

공무원 행동강령 제2장 4조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공무원은 상급자가 자기 또는 타인의 부당한 이익을 위하여 공정한 직무수행을 현저하게 해치는 지시를 하였을 때에는 그 사유를 그 상급자에게 소명하고 지시에 따르지 아니하거나 제23조에 따라 지정된 공무원 행동강령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과 상담할 수 있다."

하지만 경직된 공무원 사회에서 이를 그대로 따르긴 힘듭니다. 그래서 공정위 과장과 사무관은 업무는 업무대로 하되 진행상황을 꼼꼼히 기록해 문제가 됐을 때 실체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었던 것이죠. 그런데 산업부에선 어떤 파일을 만들고, 어떤 내용을 청와대에 보고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는 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중앙부처 공무원이 생산한 문서가 사라진 것이죠.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고 수립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담긴 파일은 정부의 재산입니다. 이를 개인이 마음대로 파기한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죠.

또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궁금증과 함께 의심이 커졌습니다. '떳떳하지 않기 때문에 지운 게 아닐까'하는 결론에 가닿기 때문입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국정감사에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다만 조직적인 은폐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고 해당 공무원들의 단독 일탈행위로 마무리 지으려 했습니다. 혼자 했어도 문제고, 조직적으로 했다면 더 큰 문제입니다. 몇 사람이 같이 했냐보다 중요한 문서가 사라진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 조선일보DB

 
■ 영혼 없는 공무원

"공직자는 국민과 함께 깨어있는 존재가 되어야지, 그저 정권의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공정하게 일하라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산업부 공무원들에겐 다시금 되새겨야 할 말일 겁니다.

그렇다고 이번 사건으로 징계를 받게 될 산업부 공무원들만 욕할 수는 없습니다. 상급자의 지시가 절대적인 업무 문화와 정권의 공약을 최우선시 하는 관가의 행동 양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또 이런 벌어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공무원들을 징계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업무체계와 문화를 정비하고, 자료 보관 매뉴얼도 만들어야겠죠. 모든 공무원들이 수첩에 사건일지를 적을 수는 없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정부의 업무문화와 행태를 되짚어봐야 합니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공정거래위원회 과장은 현재 국장으로, 사무관은 과장으로 승진해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 송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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