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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취재후 Talk] '박원순 위력 성폭력' 피해자의 4가지 소망, 3가지 요구

등록 2021.03.21 12:02 / 수정 2021.03.2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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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피해자는 지난 17일 피해 사실 폭로 후 처음으로 취재진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그는 "저는 고 박원순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피해자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용기 내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있어 '말하기'는 의미 있는 치유의 시작이라고 합니다"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어 "제 존엄의 회복을 위해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며 박 전 시장 사망 후 252일 만에 처음으로 기자회견장에 직접 선 이유를 밝혀나갔습니다.

◆ 피해자가 밝힌 "하고 싶은 말"…네 가지 소망

피해자는 첫 소개를 마친 뒤 잠시 울먹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곤 "하고 싶은 말", 즉 네 가지 소망을 전했습니다.

첫째 "제가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저는 당당하고 싶습니다"

둘째 "저의 회복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신다면 용서하고 싶습니다"

셋째 "피해 사실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께서는 이제 소모적인 논쟁을 삼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넷째 "거대한 권력 앞에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 그 즉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누군가 고통 받는 일이 생긴다면, 모두가 약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사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 피해자가 밝힌 "하고 싶은 말"…세 가지 요구

그는 그러면서 정치권, 특히 민주당에 대해 "민주당에서는 할 일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며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째 "저를 피해호소인이라고 명명했던 그 의원들에 대해 직접 저에게 사과하도록 박영선 후보님께서 따끔하게 혼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피해호소인이라고 지칭한) 그 의원들에 대한 당 차원의 징계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셋째 "제가 지난 1월에도 남인순 의원의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그분으로 인한 저의 상처와 사회적 손실은 회복하기 불가능한 지경입니다. 반드시 정치적 책임을 지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피해자의 요구 외면하는 與

여권은 한나절 뒤 반응했습니다.

피해자는 박영선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에게 "따끔하게 혼내달라"고 요구했는데, 박 후보는 그로부터 10시간 뒤, "오늘 '박 전 시장 피해자' 회견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생각이 많으셨겠습니까? 진심으로 위로를 전합니다"라고 첫 문장을 썼습니다.

피해자는 "용서하기 위해 '지은 죄'와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게 먼저"라고 했는데, 그 부분은 시작부터 비켜갔습니다.

박 후보는 이어 "제 이름이 언급됐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후보입니다"라면서 "제가 진심으로 또 사과드리고 용서도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제가 해주십시오. 제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겠습니다"라고 한 뒤, "고맙습니다"라고 글을 맺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평소 박 후보의 '순발력 좋고, 상황 판단 빠른'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글이었습니다. 직접 쓰신 게 맞나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기자 출신의 박 후보가 글을 쓰면서 두루 고려했을 줄 압니다만, 이 글을 읽는 피해자 역시 만감이 교차했을 듯합니다.

피해자의 기자회견 다음 날, 박 후보 캠프의 고민정 의원이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함께 대변인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박 후보는 SNS에 "통증이 훅 가슴 한쪽을 뚫고 지나갑니다"라면서 "이렇게 해서라도 치유가 된다면 하루빨리 해야하지 않겠냐고 고민정 대변인이 저한테 되묻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고 의원의 신속한 결정과 사과는 분명히 평가 받아야 하지만, 박 후보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글에서 마치 피해자 보다 고 의원을 더 염려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저 뿐일까요?

◆ 피해자의 소망 외면하는 야권

피해자는 "저의 회복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라면서 "진심으로 사과 하신다면 용서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야권이 진정 피해자를 위한다면, 여권 관계자들이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피해자가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고, 피해자를 돕는 길이니까요.

그런데 이 문제를 정치 쟁점화해서 여권이 사과하는데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면, 그 역시도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빠른 사과를 했던 양향자 의원, 대변인직을 내려놓은 고민정 의원, 박 후보 캠프 공동선대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진선미 의원의 '용기'를 응원하고 박수쳐야 또 다른 의원들이 용기 내 '사과 행보'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해자를 고리로 정쟁화를 시도하는 것은 피해자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피해자가 근무했던 곳은 이명박, 오세훈 전 시장이 이끌던 서울시가 아니었습니다. 피해자 측은 여권을 비판했을 뿐, 야권을 지지한다는 언급은 안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피해자 편에 서는 길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를 가정하며, "긴 시련의 시간을 잘 이겨내고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고 다독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온라인상에 올라온 각종 게시물을 접하는 가족들과 관련해선 "보는 것 뿐 아니라 지워나가는 데 너무 끔찍하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며 "실질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토로했습니다.

이 사회를 향해선 "사실에 관해 소모적 논쟁이 아닌 진정성 있는 반성과 용서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사회를 볼 수 있길 소망한다"며 반목과 대립이 아닌 화합과 발전을 주문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강조하는 박 후보나, 당명에 모두 '국민'이란 글자가 들어간 야권 유력 주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소망과 요구는 아닐 것입니다.

지난 19일 피해자 측 김재련 변호사가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이 계속 머릿 속에 맴돕니다.

"정치란 무엇인가? 사람을 지향하는, 가치를 지향하는 공적활동 아닌가?" / 백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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