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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차담차담] 동풍이 서풍을 이길 줄 알았는데…

등록 2024.02.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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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방호 다 모여라! ⑩

1956년 7월 FAW(First Automobile Works)가 창춘 공장에서 생산한 중국 최초의 자동차 'Jiefang CA-10' 출고 당시의 모습

1953년은 중국 '5개년 계획'의 첫 해다. 중국 공산당은 경제·사회적으로 서방을 빨리 따라잡길 원했다. 자동차 분야도 빠지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창춘에 공장을 지었다. 중국의 첫 번째 자동차 공장, FAW(First Automobile Works)다.
 

'Jiepang CA-10'은 옛 소련 ZiS-150 트럭의 중국 버전이다. 소련은 중국 외의 나라에도 생산 장비와 기술을 지원했다. 루마니아는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브라소프 공장에서 'Steagul Rosu(Red Flag) SR-101'을 생산했다. 북한도 적어도 한 대의 '천리마'라는 프로토타입을 제작했지만, 양산하지는 않았다


소련에서 ZiS-150 트럭의 기술과 장비를 제공받았다. 3년이 지나 중국 최초의 자동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민해방(Jiefang)군의 트럭(Cargo), Jiefang CA-10이다. 1982년까지 100만 대를 생산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은 법. 마오쩌둥이 트럭을 처음 본 뒤 한 말은 이랬다. "언젠가 우리가 중국산 세단을 타고 회의에 참석할 수 있으면 좋겠다".
 

1962년 상하이전기연구소 부소장 당시 장쩌민의 모습. 이 때만 하더라도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쩌민은 집권 기간(1989년~2003년) FAW를 3차례 공식 방문했다. 스스로를 'FAW의 남자'라고 불렀다


FAW는 설립 직후 해마다 소련 공장에 연수생들을 보냈다. 장쩌민은 이 가운데 한 명이다. 1년간 다녀와 창춘과 우한 공장의 책임자로 일했다. 덩샤오핑은 1976년 집권 이후 장쩌민을 중용했다. 미국과 수교 후 경제특구(SEZ)를 장려하는 위원회 부주석(차관)으로 임명했다. 1983년 국무원 전자공업부장(장관)에 올랐다. 1987년 상하이 서기장직과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며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1945년 당시 만주국의 철도망 지도. 러시아는 창춘에 공장을 세울 것을 권했다. 동북 지역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1898년 하얼빈에서 다롄까지 이어지는 부설권을 따내 철도를 건설했다.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지고, 이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일제의 소유가 됐다. 일제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해 운영했다. 일제가 1931년 랴오닝성 선양(지도상의 펑톈·Fengtian)의 노선을 일부러 폭파하고, 중국이 공격했다며 일으킨 게 만주사변이다. 일제는 1932년 마지막 황제 푸이를 허수아비로 내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창춘을 수도로 삼았는데, '새로운 수도'라는 의미로 신싱(新京)으로 바꿨다


마오쩌둥은 1949년 스탈린으로부터 선물받은 ZiS-115를 의전차로 썼다. 중국산 세단에 대한 열망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FAW 창춘 공장의 다음 수순은 당연히 '하명 세단'이었다. 중역용과 지도자급을 구분해 개발했다.
 

둥펑 CA71이 내·외관을 사실상 베낀 1957년형 상카 비데트


FAW는 각국의 세단에 대한 정보를 끌어모았다. 중역용으로 프랑스 상카(Simca)의 '비데트(Vedette)'를 찜했다. 비데트는 당시 메르세데스-벤츠의 4기통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는데 '리버싱'했다. 동일한 성능을 얻기 위해 엔진을 모두 뜯어내 분석했다.
 

둥펑 CA71이 상카 비데트와 다른 점은 라디에이터 그릴 정도다


1958년 5월, 프로토타입을 선보였다. 중국 최초의 세단, 둥펑(東風·Dongfeng) CA71이다. 둥펑은 마오쩌둥의 1957년 모스크바 연설 "동풍이 서풍을 이길 것"이라는 말에서 따왔다. 1961년까지 30대를 제작했다. 전장 4560mm의 미드사이즈 세단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59년부터는 지도자용 리무진을 생산해야 한다고 독촉했다. FAW는 크라이슬러 임페리얼을 대놓고 베꼈다. 8기통 엔진도 리버싱했다. 전장은 5740mm에 달했다. 테스트와 업그레이드를 거쳐 1959년 8월 생산을 시작했다. CA72에는 중국의 디자인이 들어가 있다. 부채꼴 그릴과 왕실 등불 모양의 미등이다. '붉은 홍치 로고'는 마오쩌둥의 친필이다

지도자용의 프로토타입은 석 달 뒤 나왔다. 당의 상징 '붉은 깃발'을 모델명에 썼다. 홍치(紅旗·Hongqi) CA72다. 둥펑 CA71과 홍치 CA72는 1차 5개년 계획의 성과물이자, 2차 5개년 계획 '대약진운동'의 명분이었다.
 

마오쩌둥의 초상(1963년)

중국은 가난한 농업사회였다. 대약진운동은 이를 벗어나 '부강한 사회주의산업국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당장 자본은 없었다. 농민이 농업생산량을 늘려 만들어야 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위해 몇 가지를 제시했다.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과 집단농장, 그리고 토법고로(土法高爐·전통적인 기술로 만든 소형 용광로)다.
 

1959년 베이징에서 회동한 중국과 소련, 베트남 공산당의 서기장들. 사진 왼쪽부터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치민, 쑹칭링이다. 쑹칭링은 중화민국 초대 임시대총통 쑨원의 부인이다. 1925년 쑨원 사망 이후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됐다. 국민당 내 진보세력을 이끌다 1945년 공산당으로 전향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와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 사망 직후에 명예직 국가주석을 지냈다. 중국 현대사의 핵심 인물들과 결혼한 쑹씨 세 자매 중 둘째다. 첫째인 쑹아이링은 부유한 은행가 쿵샹시와 결혼했고, 막내인 쑹메이링은 국민당의 장제스와 결혼했다. 공산당과의 싸움에 패한 국민당 정부를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한 메이링은 장제스가 죽은 지 3년 뒤인 1978년 미국으로 이주해 현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두 자매는 평생 연락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1958년 제사해운동의 포스터(왼쪽). 해로운 네 가지가 들쥐, 파리, 모기, 참새였다가 1960년 포스터에는 참새 대신 바퀴벌레가 들어갔다(오른쪽)


제사해운동은 '들쥐, 파리, 모기, 참새'를 없애자는 것이다. 우선 '곡물 도둑들'부터 퇴치하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참새가 해롭기만 한가. 참새가 사실상 멸종한 자리에 메뚜기떼와 병충해가 창궐했다. 1960년에야 당 지도부는 참새가 해충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단농장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생산은 '반혁명'으로 찍혔다. 동기부여가 될 수가 없었다.
 

마을마다 수십 개씩 만들었던 토법고로. 쓸모 없는 잡철만 양산했다


집 뒤뜰에는 토법고로를 지어 강철을 생산하게 했다. 거대한 제철 시설 없이도 철강부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철 제조에는 엄청난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다.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농민들에게 대장장이 역할도 하라는 '억지춘향'이었다. 여기서 나온 철이 제대로였을까. 불순물이 가득한 잡철이었다. '잡철 농기구'는 부러지고 휘어지고, 엉망이었다. 농사도 망(亡), 강철도 망(亡), 죽도 밥도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은 집단농장화를 추진하며 농민들을 '인민공사' 회원으로 등록하게 했다. 사유 재산 대부분을 몰수했다. 토지와 농장, 도구와 가축까지 가져갔다. 엄격하고 군사화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마오쩌둥을 연구한 필립 쇼트(Philip Short)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모든 사람은 이틀에 한 번씩 최소 6시간의 수면을 취해야 했지만 일부는 최대 4~5일 동안 쉬지 않고 일했다는 걸 자랑하기도 했다. 집단 보육을 도입했고, 개인별 요리를 금지했다. 마오쩌둥은 "공산주의는 공짜로 먹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는데, 공동 식당을 통해 식량 유통과 소비의 모든 측면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들이 엎친데다 '가뭄 아니면 수해'가 덮쳤다. 첫 해부터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마오쩌둥은 4년이 지난 1962년에야 실패를 공식 인정하고 국가주석직을 사임했다. 이 기간 중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아사자만 2158만 명. 학계는 5천만 명 가량으로 추정한다. 4년 남짓한 1차 세계대전 기간의 사망자가 2천여만 명이다. 같은 기간 두 배 이상의 중국인이 굶어죽었다. 처참했던 대약진운동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원시공산주의의 실험'이었다.
 

1966년 12월 베이징에서 열광하는 홍위병들에 둘러싸여 박수를 치고 있는 마오쩌둥. 오른쪽은 미오쩌둥의 후계자로 공식 지목됐던 린뱌오 당시 국방장관이다.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의 야전사령관으로 22년에 걸친 공산당의 정권탈취 투쟁에 기여했다. 1971년 마오쩌둥이 자신을 숙청하려는 사실을 알고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직후 몽골로 도피하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마오쩌둥은 불안한 권력을 다잡으려고 대대적인 사상운동을 벌였다. 1966년의 문화대혁명이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고 혁명성을 점검했다. 경제와 사회안정을 내팽개치고 사상 검증에만 목을 맸다. '홍위병'은 오래된 관습·문화·습관·사상을 버려야 한다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공자 묘지와 영락제 동상 등이 이 때 사라졌다. 이는 마오쩌둥 개인 숭배에까지 이르렀다. 이 시기 중국의 산업생산은 해마다 평균 10% 가량 하락했다.
 

CA770(사진 위)과 방탄모델 CA772(가운데). 아래는 서방과의 격차를 실감하게 해준 1979년의 CA774. 이를 개발하면서 중국 정부와 FAW에 제대로 '현타'가 왔다. 서방 자동차업체에 협력을 요청하기 민망할 정도로 중국의 기술력은 저급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잃어버린 18년'은 그만큼의 '퇴보'를 의미했다. 1981년 5월 인민일보는 '훙치' 생산 중단을 보도했다. 기술력을 담보할 수 있을 때까지 의전차를 수입하기로 했다. 1984년 국가 의전차로 독일 브랜드를 들여왔다. FAW는 이후 폭스바겐, 도요타 등과 협력해 대중차 시장에 진출했다


홍치 CA72는 이후 30여년 간 변한 게 거의 없다. 1965년의 Hongqi CA770도 외부 디자인만 약간 바꿨을 뿐이다. 처음 방탄모델을 개발한 건 1969년이다. 중앙보안국이 CA772 개발을 주도했다. 65mm 두께의 방탄유리를 입었다. 1972년까지 15대를 제작했다. 이 중 3대를 북한과 베트남, 캄보디아에 수출했다.
 

2019년 베이징에서 열린 건국 7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 주석이 의전차 L5(위쪽 사진)의 퍼레이드용 모델(L9)을 타고 인민해방군 장병들을 사열하고 있다. 퍼레이드용에는 사진처럼 4개의 마이크를 설치했다

2009년 건국 60주년을 맞아 대규모 인민군 열병식을 계획했다. FAW는 예전 CA770을 바탕으로 퍼레이드용 CA7200L을 급히 제작했다. 중국 정부는 이참에 의전차를 다시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기준은 '캐딜락 원'이었다. 2013년 탄생한 Hongqi L5다. 머리받침 부분은 황제의 의자처럼 보이도록 용(Dragon) 모양으로 제작했다. 2014년 11월 시진핑 주석이 뉴질랜드를 국빈 방문했을 땐 공수해갔다.
 

2022년 시 주석의 홍콩 방문 당시의 N701

FAW는 L5를 기반으로 현대적인 스타일을 새로 내놨다. 2018년 시 주석이 르완다를 국빈방문했을 때 데뷔한 N501이다. 지금 의전차는 업그레이드 버전 N701이다. 2022년 홍콩 방문 때 처음 공개했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위키피디아, 위키미디어, 위키피디아커먼즈, 신문사진선집(상해인민미술출판사·1957) 상하이자동차박물관, 베이징클래식카박물관, 중화인민공화국 10주년 사진집(1949-1959), www.hongqi-auto.com,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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