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쯤에 몸 컨디션이 안 좋고 자꾸 토를 하게 돼서 임신한 걸 알게 됐습니다. 무서웠어요."
취재진을 만난 16세 레아 팡안은 임신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때를 회상하며 몸을 움츠렸다.
필리핀 임산부 레아 팡안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코이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찾아온 생명, 그녀 주변에 임신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이 지역 마을 보건 요원만이 의지가 됐다고 팡안은 전했다.
팡안은 "보건 요원들이 와서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고,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조언을 해줬다"며 "(병원이 가까이에 있어) 차비를 내지 않고 진료를 볼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코이카(KOICA) 설립 보건센터…불로드 주민 3100여명 지원
타클로반시 산타페주 불로드 바랑가이 내 태풍 하이옌 피해를 입은 이주민들이 모여사는 마을 (사진 코이카)
초록색 지붕에 노란색 외벽, 10평 남짓한 동일한 크기의 연립주택에 각 가구가 살고 있었다.
상수도 시설은 갖춰져 있지 않아 몇 곳의 우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30도가 넘는 더위에도 집 전체를 선풍기 한 대만이 식혀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지역에서 팡안을 비롯한 산모와 아동을 지원하는 역할은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와 월드비전이 설립한 보건센터가 담당하고 있었다.
레아 팡안이 지역 보건요원에게 임산부가 지켜야 할 수칙 등을 전달받고 있다 (사진 코이카)
아헤또는 "이 단지 내에만 팡안과 같은 10대 임산부가 3명 있다"며 "예전에는 보건소나 보건시설이 너무 멀리 있어 그게 제일 힘들었다"고 전했다.
마을 한복판에는 주민들이 찾아갈 수 있는 보건센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코이카와 월드비전이 세운 필리핀 불로드 보건센터 (사진 코이카)
보건센터 전담 의사인 로웨나 베이라(56)는 "하루 진료 환자는 20명 정도"라며 "교통비, 진료비 문제로 큰 병원에 갈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주로 온다"고 전했다.
전지환 월드비전 차장은 "지역 보건 요원이 2세 미만 아동이 있거나 임산부가 있는 가정을 정기적인 가정방문을 통해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청소년의 혼전 조기 임신을 줄이기 위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성교육도 정기적으로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필리핀은 조혼이 흔하고 결혼 이전의 10대 임신도 아세안 국가 중 2번째로 많은 나라다. 유엔인구기금(UNFPA) 2020년 자료에 따르면 필리핀 10대 청소년 500명이 매일 출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코이카의 도움 덕에 불로드의 10대들은 계속 꿈을 꾸고 있었다.
팡안은 이날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를 가는데, 길이 좋지 않아 오토바이가 흔들릴 때마다 배가 아프다"면서도 "선생님이 되고 싶다"며 수줍게 웃었다.
학교 밖 소녀를 위한 교육사업…아들 셋 엄마도 "내 미래 준비"
타클로반 대안교육센터에서 수업이 진행 중이다 (사진 코이카)
가난과 개인사정을 이유로 정규과정에서 이탈된 전 연령대 여성을 대상으로 기초교육을 제공하는 '대안교육'을 목적으로 한다.
취재진은 2022년 9월 건립된 타클로반의 대안교육센터를 찾았다. 3개의 교실과 도서관, 과학실, 기술교육 훈련실 등을 갖춘 3층짜리 건물로, 깔끔한 시설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는 현재 교사 11명이 학생 60명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침 7시부터 등교를 시작하는데 특히 어린 아이를 데리고 수업에 들어온 중·장년층 여성들도 있었다.
대안교육학교 학생인 리사 아세딜로가 수업을 듣고 있다 (사진 코이카)
아세딜로는 15살 때 어려운 가정 환경 탓에 자신의 남동생을 위해 학교를 포기하고 일을 시작해야 했던 사연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녀는 "논리적 사고 기술 수업과 소통 수업과 디지털 시민 수업을 배우고 있다"며 "이 교육을 마치면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경제적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 대안교육센터를 수료하고 학력을 인정받아 안정된 직업을 찾은 졸업생도 만날 수 있었다.
다르미엘 바힌팅(29)은 태풍 하이옌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가족 생계유지를 위해 일을 해야 했지만, 현재는 모든 과정을 이수한 뒤 필리핀 통계청에서 통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대안교육으로 자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면서 "교육이 많은 기회들을 나에게 주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코이카 필리핀 진출 30주년…"韓,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필리핀 마닐라 페닌슐라 호텔에서 '코이카 필리핀 사무소 개소 3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됐다 (사진 코이카)
코이카는 1994년 12월 필리핀에 해외 사무소를 공식 설립했다. 1991년 50만 달러였던 예산은 2024년 3천350만 달러로 30년간 누적 지원액이 4억 달러에 달한다. 30년 만에 67배 증가한 셈이다.
필리핀 전역의 다양한 분야에서 약 55건의 공식 개발원조 사업을 완료했고 지금도 24건이 더 진행 중이다.
코이카가 타클로반 지역에서 실시하고 있는 모자보건 사업과 대안교육 사업은 태풍이라는 역대급 재난으로 꿈을 잃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특히 해외 원조를 받던 수혜국에서 공여국이 된 한국의 위상이 필리핀에게 시사하는 바는 더 크다.
김은섭 코이카 필리핀 사무소장은 "필리핀은 최빈국은 아니지만 여전히 개발원조위원회(DAC)의 수원국 리스트에 있는 저소득국이며 한국 전쟁 때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군대를 파병해 도와준 형제의 나라"라며 "필리핀에서 받았던 도움을 되돌려 준다는 의미에서 필리핀 원조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타클로반 지역에 대한 보건·교육 지원은 재난 피해를 당한 현지 주 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수원국 중심'의 사업"이라며 "현지 주민의 삶의 질 향상, 수원국과 지원국의 우호협력 증진 등 개발 협력의 기본 목표를 충족시킨 성공적인 원조의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타클로반=홍연주 기자, 외교부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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