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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이야기] 외교의 성패는 상대국 호응에 달렸다

등록 2023.03.08 08:31

그리스로 여행을 가서 아테네를 벗어난다면, 대개 둘 중 하나다. 비행기나 배로 이동한다면 산토리니섬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고, 차편을 이용한다면 십중팔구 메테오라가 목적지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메테오라로 가는 길에 어지간하면 들르는 곳이 델피 신전이다.

델피 신전은 고대에 기가 막힌 신통력으로 정평이 났던 곳이다. 많은 고대국가가 델피 신전에서 신의 뜻을 물어 국가 중대사를 결정했다. 좋은 점괘를 내려달라는 뜻에서, 혹은 국가적 위기를 잘 극복했다는 감사의 뜻으로 온갖 보물을 바치는 곳이기도 했다.

 

[아테네 이야기] 외교의 성패는 상대국 호응에 달렸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 델피 신전의 신통력은 실제로는 신탁을 내려달라고 온세상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모인 정보력에 기반했을 가능성이 많다. 현대의 점집에 가도 그러하듯이, 당시 델피 신전도 복채에 따라 점괘가 달라지기도 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물리친 살라미스 해전은 그렇게 조작된 신탁을 근거로 벌어진 전투였다.


허물어진 기둥과 돌덩이들만 나뒹구는 지금 과거의 영화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 와중에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보여주는 두 가지 유물이 있다. 하나는 청동으로 만든 기둥이다. 뱀 세 마리가 서로 몸을 꼬아 하늘로 오르는 형상이다. 페르시아군의 침략을 물리친 뒤 그들의 방패를 녹여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깃든 유물이다. 페르시아의 2차 침입 당시 살라미스 해전으로 일격을 가한 뒤, 육상에서 페르시아군을 궤멸시킨 플라타이아 전투를 기념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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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의 뱀기둥. 진품은 튀르키예에 있고, 델포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또 하나의 영광의 유물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덩이 사이로 그나마 멀쩡한 건물 모양을 하고 있는 아테네인의 보물창고다. 이 보물창고는 페르시아군의 1차 침입을 물리친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봉헌한 제물을 보관하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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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인의 보물 창고. 고대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현대에 복원한 모습이다. 솔직히 델피 전체 분위기와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복원 결과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으로는 10만 명의 페르시아 병사가 마라톤에 상륙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2~3만명이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어쨌든 아테네의 1만 병사보다는 훨씬 많았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전투 결과 페르시아군 전사자 6,400명, 아테네군 전사자 192명이었다. 아테네의 대승이었다. 당대 세계 최강국 페르시아를 상대로 그리스 안에서도 변방이었던 아테네가 승리를 거둔 말 그대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마라톤 전투를 이끌었던 아테네군의 장수가 밀티아데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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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군사박물관에서 만난 밀티아데스. 밀티아데스는 아테네의 장군 노릇을 했지만, 원래는 페르시아와 맞닿은 변방 케르소네소스의 참주였다. 케르소네소스는 자원이 많은 데다 보스포로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관리하기 때문에 돈이 많았다. 하지만 무리한 해외 원정을 떠났다가 자녀에게 엄청난 빚만 물려주고 세상을 뜨고 만다.


밀티아데스가 남긴 엄청난 빚을 떠안은 아들이 키몬이었다. 당시에는 결혼할 때 여자가 지참금을 갖고 가야 했는데, 밀티아데스의 딸이자 키몬의 누이인 엘피니케는 돈이 없어서 시집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될 정도였다. 그래서 키몬과 함께 살았던 모양인데, 이 때문에 키몬은 평생 누이와 정을 통했다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집안이 재기한 것도 결국 누이 덕분이었다. 아테네에서 부자로 유명했던 칼리아스가 엘피니케와 결혼하면서 아버지의 빚까지 갚아줬기 때문이다. 키몬 자신은 훗날 자신의 경쟁자가 되는 페리클레스의 외삼촌인 메가클레스의 손녀와 결혼했다. 당시만 해도 아테네 정치는 유력 가문들의 대결장이었다. 키몬은 최고의 정치적 배경을 확보했다.

키몬은 살라미스 전투가 있은지 2년 후인 서기전 478년에 장군으로 선출됐다. 아테네를 해상제국으로 만드는 델로스 동맹을 만드는 밑그림을 아리스테이데스가 그렸다면, 키몬은 톱과 망치를 들고 집을 지었다. 키몬은 육상에서는 트라키아의 에이온을 점령해 페르시아군을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 너머로 쫓아냈다. 또 바다에서는 키프로스 섬 근처까지 내려가서 에우리메돈 강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로 에게해는 아테네의 안마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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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파포스 언덕에 있는 키몬의 무덤.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고 알려진 곳에서 민회가 열리던 프닉스 언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사실 키몬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곳은 아테네에 두 곳이 더 있다. 2인용인 이 무덤의 표지판에는 키몬의 할아버지인 또다른 키몬과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함께 묻힌 곳이라고 적혀 있다. 투키디데스가 키몬의 일족이긴 하지만, 할아버지 키몬과 투키디데스의 사망 시점은 100년 가까이 차이 난다.


많은 경우 성공은 몰락의 이유가 된다. 키몬 역시도 그랬다. 아테네를 해상제국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3단노선에서 노를 젓는 빈민들(그리스에서는 '테테스'라고 불렀다)의 정치적인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귀족 출신인 키몬은 참정권을 확대할 마음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농장을 빈민들에게 개방하고 자신의 집에다 급식소를 만들어서 배고픈 누구라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선심을 썼을 뿐이다. 또는 새로 점령한 땅에 빈민들을 이주시켜 땅주인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 시점에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스파르타에 큰 지진이 발생하고, 그 틈에 반란이 일어났다. 스파르타는 스스로를 헤라클레스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북방 출신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을 노예화해서 지배하는 나라였다. 지배층보다 수십배나 숫자가 많은 피지배층('헤일로타이'라고 부른다)이 지진을 틈타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면서 스파르타는 국가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 이때 키몬은 스파르타를 돕기 위해 직접 4천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떠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

키몬에게 스파르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아들의 이름도 스파르타의 또다른 이름인 '라케다이몬'을 따서 라케다이모니오스로 지었다. 민회에서 아테네인들의 저질 정치행태를 비판할 때도 "스파르타인들은 이러지 않는다"는 말로 혼내듯 말하곤 했다.

물론 스파르타 파병 결정을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하지는 않았다. 직접 전장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웠던 키몬에게 페르시아의 침략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현재의 일이었다. 그리고 페르시아가 다시 쳐들어왔을 때 물리치려면 스파르타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게 키몬의 생각이었다. "그리스를 외다리로 서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미 해상제국을 건설한 아테네에게 스파르타는 패권 경쟁자이기도 했다. 그리스의 패권을 두고 언젠가 한판 전쟁이 불가피한데, 때마침 스파르타가 반란으로 스스로 무너진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우리의 경쟁자인 스파르타를 돕다니 말도 안도지. 스파르타가 망하도록 내버려둬야 해."

키몬의 명성이 키몬의 말에 힘을 실어줬는지, 민회는 결국 파병을 결정했다. 키몬은 4천명의 중장보병을 이끌고 스파르타로 갔다. 사달은 그때 일어났다. 막상 4천명의 외국 군대가 오자 스파르타가 겁을 먹었다. 구원병으로 왔다지만, 갑자기 점령군으로 변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철군을 요구했다. 선의로 도움을 주러 갔던 키몬은 하릴없이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발없는 말이 발보다 빠른 법이어서, 키몬의 군대가 돌아오기도 전에 아테네 시민들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키몬은 스파르타에 망신을 당했고, 아테네는 모욕을 당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분노했다. 민회가 열렸다. 그리고 키몬을 도편추방시키고 말았다.(키몬이 이끌고 간 4천명의 중장보병은 귀족 또는 중산층이다. 이들이 자리를 비운 민회에서 귀족의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빈민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확대하고, 귀족들의 전유물인 아레이오파고스의 권한을 사실상 없애버리는 조치도 통과시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해상제국 건설의 영웅 키몬에게는 몰락의 순간일 뿐이다.

역사를 짧게 보면,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패권 경쟁자라는 시각이 옳다. 불과 30년 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니 말이다. 역사를 길게 보면,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더불어 그리스를 떠받치는 두 다리라는 키몬의 시각이 옳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전쟁 결과 결국 두 나라 모두 몰락해 그리스는 세계사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마니까. 당장은 인기 없는 정책이었을지 몰라도, 스파르타와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키몬의 말을 아테네가 귀담아 들었어야 한다.

키몬은 적어도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할 수는 있었기에 스파르타로 출병했다. 하지만 정작 스파르타가 벽창호였다. 하긴 가뜩이나 지진과 반란으로 난리가 났는데, 무장한 외국군을 4천명이나 들이기는 불안했을 법도 하다. 그렇게 키몬을 내쫓은 결과, 아테네에는 스파르타에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머지 않아 30년 가까운 내전의 단초가 싹트는 순간이었지만, 스파르타는 키몬만큼 길게 보는 혜안 대신 당장의 불안감에 따라 결정하고 움직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해법을 내놨다. 가해자인 전범기업들이 직접 배상하지 않고, 국내 기업이 돈을 내는 간접 배상 방식이다. 피해자단체들은 반발하고 비판 집회를 열고 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정부로서도 정치적 부담을 각오했기에 "미래를 위한 결단"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핵 위협은 이미 임계치를 넘어섰고, 중국의 패권주의도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혈맹인 미국도 반도체와 자동차 분야에서 우리를 향해 압박해오는 상황이다. 이 모든 문제를 풀기 위해 한, 미, 일 3각 동맹의 회복이 절실하다. 미루면 당장의 욕은 안 먹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더욱 곪는다. "언젠가 해야 하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지금 내가 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다만, 위험은 다시 일본이다. 윤 대통령의 결단이 일본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면, 정치적 부담은 애초 감수했던 것보다 몇배나 크게 돌아올 수 있다. 한국 정치에서 '친일'이라는 낙인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신속하게 한일 공동기금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법적인 책임을 따지기에 앞서 피해자의 상처를 달래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보여줘야한다.

스파르타의 오판은 당장은 키몬의 몰락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길게 보면 스파르타에 적대적인 아테네 정권을 불러왔고, 더 길게 보면 기나긴 내전으로 스파르타와 아테네 모두가 몰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은 키몬의 구원병을 내쫓은 스파르타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테네 이야기] 외교의 성패는 상대국 호응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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