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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담차담] "대대손손 가보로 삼거라"

등록 2023.08.10 09:00

수정 2024.01.11 18:09

조랑말 신화의 뿌리 ③

[차담차담] '대대손손 가보로 삼거라'
1886년 칼 벤츠의 페이턴트 모터바겐


칼 벤츠는 1886년 페이턴트 모터바겐을 몰고 종종 거리로 나갔다. 이웃들은 싫어했다.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지나는 마차의 말을 놀라게 해 마부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차담차담] '대대손손 가보로 삼거라'
칼 벤츠가 바덴 대공국 정부로부터 받은 운행허가증. 전 세계에 가장 많은 자격증으로 불리는 운전면허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주민들이 항의하지 못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벤츠는 정부의 허가증을 보여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바덴 대공국 정부에 '운행허가서'를 요청했고, 1888년 받아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격증, 운전면허증의 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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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프랑스 파리 경찰이 시행한 세계 최초 면허시험의 첫 합격자 에밀 르바소. 현대적인 개념의 시험은 아니었다


프랑스 파리 경찰은 도로에 자동차가 늘어나자 대책을 세웠다. 기본은 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출발' '정지' '곡선주행'을 평가했다. 1893년 치러진 시험에 에밀 르바소가 합격했다. 세계 최초 면허시험의 첫 합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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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르바소는 프랑스 '파나르 르바소(Panhard et Levassor)'의 공동대표였다. 1900년대 초반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로 이름을 알렸으나 1차 세계 대전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포르투갈에서 최초로 등록된 자동차가 '파나르 르바소'였다(사진 아래)


르바소는 '파나르 르바소'의 공동대표였다. 르네 파나르와 1887년 공동 설립했다. 다임러(DMG)의 엔진을 가져와 1890년부터 자동차를 생산했다. 1891년 '시스템 파나르'로 불리는 현대식 세로배치 엔진 구동계를 정립했다. 1903년에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였다. 종업원 1500여 명이 연간 1000대 이상을 생산했다. 1차 세계대전 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1967년 시트로엥이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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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독일의 운전면허증


영국은 1904년 '허가'를 의무화했다. 차량을 등록하면 번호판과 운행허가증을 주었다. 별도의 시험은 없었다. 현대식 운전면허 시험은 1910년 독일에서 시작했다. 교통사고로 골머리를 앓던 다른 나라들이 속속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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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아우토반 시점 표시. (오른쪽)이 표시 구간부터는 차선과 속도 등 모든 제한이 없어진다. 무제한으로 한참을 주행하다보면 숫자가 나오는데, 숫자만큼의 속도 제한이 다시 걸린다는 표시다


1호 시험국 독일에서 운전면허를 따는 건 쉽지 않다. 14시수 수업 후 90점 이상을 받아야 필기시험 합격이다. 1시수는 45분, 수업만 10시간30분을 받아야 한다. 응급 처치 교육 9시수, 도로주행 12시수(야간·고속도로 주행 포함)도 이수해야 한다. 보닛을 열어 부품과 기능을 설명하는 발표시험도 필수다. 이 때문인지 무제한 고속도로를 보유하고도 사고율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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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1호 운전자 이용문. 양성소 수료증이 운전면허증을 대신했다


경성운전수양성소를 수료한 이용문이 한국인 운전면허 1호다. 별도의 '면허증' 같은 건 없었다. 공인해줄 기관이 없었다. 양성소 수료증이 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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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보급이 늘면서 사고도 많아졌다. (사진 위)1910년대 후반 서울에서 전차와 충돌해 완파된 차량. (사진 아래)1928년엔 '유람차'가 추락하며 불이 붙는 바람에 3명이 사망했다


1915년 전국에 80대, 서울에 50대의 자동차가 있었다. 운전 실력은 들쭉날쭉했다. 도로의 어느 쪽으로 갈 지, 어디에 세워야 할 지, 요령이 있어야 했다. 기물파손과 충돌, 전복사고에 대인사고까지, 심심찮게 일어났다. 일종의 규칙이 필요했다. 1915년 7월, 최초의 도로교통법 '자동차취체규칙'이 나왔다. 29개 조 61개 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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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조선총독부는 '자동차취체규칙'을 발표했다. 첫 번째 도로교통법인 셈이다


※ 경찰에서 발급하는 도 단위 번호판을 달아야 한다
※ 시험에 합격해 운전면허증을 받아야 한다
※ 시내는 시속 13km, 시외는 시속 19km 이내여야 한다
※ 우마차나 사람에게 경음기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 만취한 자나 전염병자, 걸인을 태우지 말아야 한다
※ 차 안에서 고성방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
※ 차량 앞부분과 뒷부분에 차량 번호를 표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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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이O수'씨의 운전면허증. 소유주가 아니라 운전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전면허증을 위한 시험이 1916년 등장했다. 학력 제한이 있었다. 소학교(초등학교) 이상이었다. 학과와 실기를 치렀다. 학과는 여러 장치의 이름과 기능을 숙지하는 것이었다. 실기는 전진과 후진, S와 T코스, 타이어 교환, 냉각수 주입 등이었다. 두 과목 모두 100점 만점에 75점 이상이면 합격이었다.

"재물파손과 인명을 살상하는 불상사가 연일 발생해 이를 방지하고자 (중략) 합격한 자만이 운전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하니 금후 자동차 운전수 되기도 심히 어렵게 될 지경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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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경성자동차강습소 신문 광고. 윗부분에 입학자격, 학원비 등을 소개하고 있다


합격은 집안의 경사였다. 면허증을 가보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할 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던 시절 운전은 '고수입'이었다. 1920년 운전수는 한 달에 100원 정도를 벌었다. 귀했던 대졸자 월급이 40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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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배우려는 수강생들이 몰렸다. 고수입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1919년 경성자동차강습소가 황금정 3정목(을지로 3가)에 문을 열었다. 수강생들이 몰렸다. 132원이나 하는 학원비를 기꺼이 투자했다.
"경성자동차강습소는 시설도 좋고 조선인 강사도 있어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을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동아일보 1920년 4월 24일자)"
"1920년 6월 치러진 경기도청 운전면허시험에는 시험관이 1명뿐인데 응시자는 76명이나 몰렸다(매일신보 1920년 6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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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1919년 경성자동차강습소를 수료하고 운전면허를 따낸 최인선과 문수산씨. 당시 신문 표현처럼 '여자계의 신기록'이었다. (사진 아래)3호이자 평양의 첫 여성 운전수였던 이경화씨를 다룬 1921년 기사. 결혼 뒤 출산 전까지 승합차를 몰았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극히 제한적이던 시절. 면허를 따는 여성들은 지면을 장식했다. 1919년 전주 출신 최인선과 원산 출신 문수산이 주인공들이다. 1920년 9월 '평양자동차상회'는 3호 여성 운전수 미혼의 이경화를 채용했다. 신문은 이를 머릿기사로 다뤘다. 사장이었던 이종하도 미혼이었다. 두 사람은 1년 반이 지나 결혼했다. 이경화는 첫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운전을 계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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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징발로 해방 후 이동수단이 부족해지자 서울엔 역마차가 다녔다


1940년까지 4000여 대 가량의 자동차가 있었다. 하지만 일제는 자동차와 운전수 대부분을 태평양전쟁에 징발했다. 해방 직후 서울엔 버스 10여 대, 전차 100여 대, 택시 40여 대만 남아 있었다. 서울 인구는 95만여 명, 교통난 때문에 역마차가 다녔다.

 

(사진 : 위키백과, 나무위키, 위키미디어커먼즈, 명재연구소, 매일신보, 동아일보,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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