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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담차담] "라떼는…넘어진 차를 손으로 세웠어"

등록 2023.08.24 09:00

수정 2024.01.11 18:11

조랑말 신화의 뿌리 ⑤

서울 아현동의 정비공장 아도서비스에 불이 났다. 종업원이 손 씻을 물을 데우려고 불을 피우다 시너에 불똥이 튀었다. 정주영이 인수한 지 25일 만이었다. 신설동 공터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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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산골 청년 정주영은 1934년 상경해 서울 신당동의 쌀가게에 취직했다. 1938년 가게를 물려받은 뒤 사진 속 트럭을 구입해 농촌을 다니면서 직접 쌀을 사들이기도 했다. 1940년 일제가 쌀의 자유판매를 금지하고 배급제를 실시하는 바람에 가게 문을 닫았다. 몰고다녔던 트럭을 단골로 정비해주던 이가 이을학씨인데, 이씨의 소개로 아도서비스를 인수했다


자동차는 극소수의 부유층만 갖고 있었다. 아쉬울 게 없는 계층이었다. 고장 났을 때 원하는 건? 돈은 상관없었다. 정주영은 '제대로, 빨리' 고치고 수리비를 아주 비싸게 받았다. 3배 이상 비쌌다. 출고까지, 사흘을 넘기지 않으려 했다. 수익이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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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주년을 맞아 촬영한 직원들의 기념사진


1941년 말 일제는 기업정비령을 내렸다. 아도서비스도 문을 닫았다. 정주영은 정리한 자금으로 트럭을 사 석탄배달을 했다. 해방 후 적산대지를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자동차는 현대 문명의 이기라는 생각에 사명을 '현대'로 했다. 대부분 미군 병기창에서 하청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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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의 자금이 건설 쪽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정주영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현대토건'을 간판부터 올렸다


미군정(美軍政)의 돈은 다른 쪽으로 더 많이 흐르고 있었다. "건설업자들이 미군 자금을 긁어가는 걸 보고 우리 역량으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간판부터 올렸다". 현대토건사를 세웠고, 건설에 집중하기 위해 1950년 둘을 합병했다. '현대건설'이다. 한동안 자동차와 떨어져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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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원·창원 형제는 1955년 '신진공업사' 를 설립해 재생 버스를 만들었다. 1960년 부산 전포동에 버스 공장을 완공했다. 여기서 '신진 H-SJ 마이크로버스'를 생산했다. 25인승이었는데, 대부분 노란색으로 도색해 출고했다


김제원·창원 형제는 미군의 차량을 수리했다. GMC 트럭을 불하받아 재생버스를 만들다가 버스 공장을 지었다. 여기서 출시한 'H-SJ 마이크로버스'가 히트를 쳤다. 대부분 노란색으로 출고해, '노랑차'라는 애칭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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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의 세단은 코로나가 처음이 아니다. 1963년 미군 지프 부품에 '새나라'의 외형을 모방해 '신성호'라는 세단을 출시했다. 조악한 품질과 비싼 가격 때문에 판매가 부진했다. 새나라자동차가 문을 닫은 이후 부평공장을 1965년 인수했다. 토요타의 모델들을 CKDComplete Knock Down) 방식으로 생산했다. 1967년 코로나 누적 생산 5000대와 크라운 1호 생산, 창립 7주년을 동시에 축하하는 기념식을 열었다


1965년 '새나라'의 부평공장을 인수했다. 토요타와 손잡고 'CKD'로 생산했다. 반조립 상태의 부품을 들여와 조립했다. '코로나'와 '크라운'이다. 코로나는 단숨에 승용차 시장을 '지배'했다. 디젤 버스는 1970년대 초반 버스 시장을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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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출시한 대형 버스. 1970년대 초반 버스 시장을 평정했다


하지만 한순간이었다. '한국기계'를 인수한 뒤 내리막을 걸었다. 토요타는 중국 시장에 진출하겠다며 합작선을 끊어버렸다. '코로나 없는 신진'은 '앙코 없는 찐빵'이었다. 급히 50대 50으로 GM코리아를 설립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1976년 한국기계와 함께 산업은행의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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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과 GM의 합작법인 'GM코리아'는 '시보레 1700'와 '레코드'를 선보였다. 1976년 산업은행 법정관리 아래 '새한자동차'는 '제미니'를 생산했다. 대우가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한 이후 '제미니'를 바탕으로 '맵시'를 만들었고, '대우자동차'로 이름을 바꾼 후 맵시의 페이스리프트 '맵시-나'를 선보였다.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역전 3점 홈런으로 MVP가 된 롯데 자이언츠의 유두열이 부상으로 받은 게 '맵시-나'였다. (위부터 아래로) 시보레 1700, 레코드, 제미니, 제미니 신문 광고, 맵시, 맵시-나


산업은행은 새한자동차로 사명을 바꾸고 새 주인을 찾았다. 대우가 1978년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했다. 대우는 1983년 1월 GM에게서 경영권을 완전히 넘겨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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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정공은 일본에서 자전거 기술을 배우고 온 김철호가 1944년 설립했다. 전쟁 수도, 부산에서 우리나라 생산 1호 자전거 '3000리호'를 출시하며 기아산업으로 사명을 바꿨다. 아시아에서 최고로 일어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진은 1957년 경기 시흥에 지은 공장에서 작업 중인 노동자들. 자전거용 파이프를 국산화한 양산 공장이었다. 기아는 훗날 미국 자동차 시장 진출 초기, 사명 때문에 애를 먹었다. 미국에서는 KIA가 'Killed In Action(작전 중 사망)'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케이아이에이'라고 발음하지만 미국인들에게 거부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싼 맛에 타다 죽을 수도 있는 차'로 인식될 수 있었다. 시장에 안정적으로 정착한 지금은 이런 거부감 없이 '키아'로 '제대로' 발음한다


우리나라 생산 1호 자전거는 경성정공의 '3000리호'다. 전쟁 중이던 1952년 내놓으면서 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했다. '아시아(亞)에서 일어선다(起)'는 의미다. 1961년 혼다와 오토바이를, 이듬해 마쓰다와 손잡고 'K-360'을 생산했다. 기아의 첫 자동차는 356cc짜리 삼륜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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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의 삼륜차는 델타형이었다. 푸조가 2009년 상하이모터쇼에서 선보였던 트라이크(Trike)는 올챙이형이다


삼륜차는 트라이시클, 트라이크, 스리 휠러(Three wheeler)로 부른다. 앞바퀴가 하나인 델타(delta)형과, 뒷바퀴가 하나인 올챙이(tadpole)형으로 나눈다. 퀴뇨와 벤츠, 최초의 자동차 모두 델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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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각도에서 보면 뒷바퀴가 두 개인 오토바이다


부품을 들여올 때 '자동차'가 아닌 '오토바이'로 수입했다. 이 '삼발이'를 1974년까지 7742대 생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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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으로 달리면 넘어져 큰 사고로 이어졌다. 이런 전복 위험 때문에 1972년 6월부터 '삼발이'의 고속도로 진입을 금지했다


연탄 배달에 많이 쓰였다. 내리막길이나 곡선차로에서 아차하면 넘어졌다. 도로 위에서 차를 세우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처음엔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었다. 고속으로 달릴 때 전복 위험이 커지자 통행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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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의 4륜 화물차 '복사'. 마쓰다의 '복서'를 라이선스 생산했다


4륜 화물차를 출시한 건 1970년이다. '복사'와 '타이탄'이다. 복사(Boxer)는 독일산 개의 품종에서 따왔다. 기아의 공식 시판 차명이 '복사'다. 베이스 모델은 '마쓰다 복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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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출시한 브리사(위)로 기아는 그해와 이듬해 '시보레 1700' '레코드' '코티나' 등을 제치고 단숨에 승용차 시장 1위에 올랐다. 이후 라이트 등의 부분변경 모델을 선보였다(가운데). 1977년 브리사Ⅱ(아래), 1978년 K303으로 이어졌다


1974년 승용차 시장에 뛰어들었다. 마쓰다 파밀리아를 라이선스 생산했다. 스페인어로 산들바람인 '브리사'다. 1975년 오토바이는 '기아기연', 1979년 자전거는 '삼천리자공'으로 독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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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 주인공의 택시로 맹활약한 모델이 브리사다


1998년 현대자동차가 인수할 때까지 범기아그룹이었다. 삼천리자공 직원들이 기아 차를 살 때 할인 혜택을 똑같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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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승합차 역사에 기념비를 세웠다. 이런 형태의 원박스카를 '봉고차'라고 부르게 만든 모델이자, '통합조치'로 망할 뻔한 기아를 극적으로 살린 모델이다. 트럭형을 먼저 출시했고, 이후 '봉고코치' '봉고나인' '봉고타운' 등의 승합형을 출시했다. 이름은 일본 마쓰다의 '봉고'를 그대로 가져왔다. 마쓰다도 '봉고'로 완전히 일어섰다


신군부가 '자동차공업통합조치'를 내놨다. 기아는 승용차 생산을 할 수 없었다. 마쓰다의 소형트럭을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신화'로 불릴 정도로 초대박이 났다. 일본 마쓰다도 '봉고'가 먹여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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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울산 공장 전경. 지금의 1공장으로 연간생산 31만 대 수준이다. 소형차를 생산한다. 울산은 5공장까지 있다. '1~5공장'의 생산 규모는 140만 대가 넘는다. 코티나를 조립하는 노동자(사진 아래)


1967년 12월 현대건설이 '자동차'에 뛰어들었다. '독자 모델'을 추진했지만 '맨땅에 헤딩'할 수는 없었다. 단계를 밟았다. 먼저 포드의 2세대 코티나를 CKD로 만들었다. 영국 내 판매대수 2위였던 중형차다. 기술 이전을 염두에 둔 합작법인 협상과는 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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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의 '2세대 코티나'를 CKD로 생산해 '코티나'로 판매했다. 엄밀히 따지면 '유럽포드'의 모델이었다


1968년 10월 울산에 공장을 준공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코로나에 비해 고장이 잦았다. '미는 차' '고치나' '코피나' '골치나'로 불렀다. 부산사업소 앞에 택시 100대가 몰려와 '환불'을 요구하는 경적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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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는 풀 체인지 '3세대 코티나'를 1970년 10월 공개했다. 당시 많이 사용된 부드러운 웨이브 '코카콜라 보틀 라인'을 모티브로 설계했다. 현대자동차는 코티나에 이어 1971년 11월부터 '뉴코티나'를 조립 생산했다. '뉴코티나'의 국산화율은 41%였다. 78마력으로 최고 속도 160km/h를 냈다


8320대를 출고한 이후 1971년 9월에 단종했다. 후속으로 3세대 코티나를 생산했다. 품질 논란은 사그라들었다. 포드와 합작법인 협상은 완전히 무산됐다. 독자 모델에 대한 정주영의 의지가 확고해졌다.


 

사진 : 위키백과,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위키미디어커먼즈,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쇼박스, 삼성화재교통박물관,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국가기록원, 한국자동차산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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