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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담차담] 거리행진에 가마를 탈 순 없잖아?

등록 2023.11.23 09:00

수정 2024.01.11 18:17

첨단 방호 다 모여라!⑦

[차담차담] 거리행진에 가마를 탈 순 없잖아?
영국군 지휘부가 1914년 프랑스 전선에서 사용한 롤스로이스 실버고스트. 최고 50마력을 냈다. 세계 최초 '장갑차 MK-1'의 기반이 됐다(왼쪽 사진). 영국 보빙턴탱크박물관에 전시된 이 모델은 1920년에 제작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장갑부대를 만들기로 했다. 적의 총탄을 막으면서 기관총으로 공격한다면…. 롤스로이스에 요청했다. 실버고스트를 기반으로 했다. 수냉식 엔진의 장갑 차체 위에 7.7mm 회전식 기관총을 장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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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1919년 1월 12일 파리평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가 열렸다. 회의에 아랍 복장을 하고 참석한 '아라비아의 로렌스'. 회의에서 아랍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사진 위).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과 아일랜드 공화국의 내전(Irish Troubles·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정부는 롤스로이스 장갑차 100대 중 13대를 자유국에 기증했다. 장갑차의 별칭 'The Big Fella (ARR8)'(사진 아래)와 The Fighting 2nd (ARR3)'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긴 자유국 군인들의 모습


첫 인도는 1914년 12월 3일이었다. 이후 서부 전선과 중동 지역의 전선에서 활약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는 부대를 이끌고 이집트에서 튀르키예 군에 승리했다. 로렌스는 "루비보다 더 가치 있는 부대(more valuable than rubies)"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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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Suffolk Elveden'에서 훈련 중인 '탱크 MK-1'


영국은 탱크(Mark I)도 개발했다. 1916년 서부 전선 '솜 플레르 전투'에 실전 투입했다. 매우 큰 독일군 참호를 건너주길 기대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전장 8m, 꼬리 바퀴를 포함하면 10m에 육박했다. 무게는 28톤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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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벤츠가 1928년 출시한 '뉘르부르크 460'. 브랜드 첫 직렬 8기통 모델로,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엔진을 설계했다

 
전쟁은 탱크와 장갑차의 방탄 성능을 입증했다. 무거운 차체를 감당할 수 있다면 민간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차량을 구매해 개인적으로 방탄 작업을 했다. 주문생산을 한 최초의 브랜드는 메르세데스-벤츠다. 1928년 출시한 '뉘르부르크 460'을 요청에 따라 방탄으로 제작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선 알 카포네가 이 해에 방탄차를 탔다. 캐딜락을 구입해 방탄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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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벤츠는 1930년 11월 11일 비오 11세에게 '방탄 뉘르부르크 460'을 선물했다. '11'이라는 숫자가 우연일까. 80마력으로 최고 속도 110km를 낼 수 있었다{왼쪽 사진). 뒷좌석은 크림슨(Crimson·핏빛) 색으로 장식한 자리를 하나만 두었다. 동로마제국 당시엔 부와 권위의 상징색이 보라색이었다가 이후 오랫동안 크림슨이 대신했다

 
'뉘르부르크 460'은 비쌌다. 찾는 이도 없었다. 다른 모델을 구입한 뒤 필요한 만큼 방탄을 입힐 수 있었으니까. 메르세데스-벤츠는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게 선물했다. 생색도 내고 홍보도 하는 일석이조를 노린 것으로 추정한다. 어떤 교황보다도 외부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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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1세


비오 11세는 재임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1922~1939)다. '불안한 베르사유 체제' 시기다. 유럽의 어수선한 정세를 틈타 과거의 주권을 되찾길 원했다. 유럽의 나라들과 협정을 맺는데 치중했다. 18건의 협정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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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사르데냐-피에몬테의 마지막 왕이자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 시칠리아와 나폴리, 베네치아 등을 정복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뒤 1870년 마지막으로 남은 로마를 획득했다. 당시 교황 비오 9세 이후 교황과 이탈리아는 반목을 거듭했다. 그럼에도 1878년 에마누엘레 2세가 죽자 비오 9세는 로마 판테온에 유해를 매장하도록 허용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1861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1870년엔 로마를 포함한 교황청의 나머지 영토도 빼앗아버렸다. 이후 교황청과 이탈리아는 줄곧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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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돔에서 담은 바티칸 시국의 모습(왼쪽 사진).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은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거장,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가 1656년 디자인해 1667년에 완공했다. 광장 한 가운데에는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비오 11세는 협상했다. 한꺼번에 이탈리아와의 앙금을 풀어낼 묘수를 찾았다. 베니토 무솔리니 역시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타협이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결과물이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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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은 로마에 둘러싸인 내륙국이다. 전 세계 가톨릭 주교단의 단장인 교황이 국가원수다. 1984년 국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면적 0.44km²로 지구에서 가장 작은 국가다. 동시에 출산율이 가장 낮다. '0'명이다. 인구 구성원이 죄다 결혼이 금지된 주교, 신부, 수사, 수녀들뿐이다. 교황청이라고 표기하지만, 바티칸 스스로는 '성좌(聖座·Sancta Sedes·Holy See)를 대외적인 공식 국가명으로 쓴다. 광장은 하늘에서 볼 때 열쇠 구멍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베드로의 상징물이 '천국 문의 열쇠'다

 
교황청은 교황령 시절의 영토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다. 대신 이탈리아로부터 바티칸 시국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이탈리아는 가톨릭을 국교로 공식 인정했다. 성직자는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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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1958~1963년)는 메르세데스-벤츠의 방탄 300D 모델을 탔다. 뒷좌석 지붕이 뒤쪽으로 접히는 런들렛(Landaulet)이었다. '메르세데스 아데나워(Mercedes Adenauer)'로도 불렸다. 독일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의 퍼레이드카였기 때문이다. 재위 당시 고령이었던 요한 23세를 위해 오르내리기 편하도록 발판을 따로 마련했다


비오 11세 이후 바티칸은 방탄차를 공식 의전차로 사용했다. 메르세데스-벤츠가 교황 차량의 30% 이상을 공급했다. 번호판은 'SCV'로 시작한다. 라틴어 'Status Civitatis Vaticanae'(바티칸 시국)의 약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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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7세(1800~1823)의 세디아 게스타토리아(Sedia Gestatoria)

 
1978년까지 '1천년 이상' 교황은 '의전가마'를 탔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리는 예식을 오갈 땐, 타는 게 관례였다. '세디아 게스타토리아(Sedia Gestatoria)', 라틴어로 '이동을 위한 의자'다. 빨간 제복을 입은 12명의 호위병이 가마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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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용 포프모빌의 시작은 1979년 6월 요한 바오로 2세의 폴란드 방문 때였다. 폴란드 브랜드 'FSC Star'의 소형트럭 '660'을 기반으로 했다(사진 위). 포프모빌에서 내려 걸어가며 신자들을 만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국빈 방문하는 국가가 늘어났다. 현지에선 수백만 명의 신자들이 몰렸다. 거리행진에는 자동차가 있어야 했다. 포프모빌, 교황(Pope)의 자동차(Automobile)가 '세디아 게스타토리아'를 대신했다. 신자들이 교황을 잘 볼 수 있도록 의자를 높였다. 처음 사용한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다. 1979년 고국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다. 현지 브랜드 'FSC 스타'의 소형트럭을 개조했다. 1980년 메르세데스-벤츠가 제공한 G-Class도 뒷좌석 의자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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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5월 13일 연설을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입장한 요한 바오로 2세를 메흐메트 알리 아자 (Mehmet Ali Ağca)가 저격했다. 브라우닝 9mm 반자동 권총을 사용했다. 교황은 복부에 총을 맞았다. 5시간여의 수술 이후 극적으로 회복했다. '아자'는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 크리스마스 이틀 뒤, 요한 바오로 2세가 감옥에 있는 아가를 방문해 용서했다. 저격의 배후에' 옛 소련'이 있었다는 말이 많았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 교황은 2002년 5월 불가리아를 방문하는 동안 '옛 소련' 지도부는 저격과 관련이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비서였던 스타니슬라프 지위스(Stanisław Dziwisz) 추기경은 저서 '캐롤과 함께하는 삶(A Life with Karol)'에서 "교황이 개인적으로 '옛 소련'이 공격의 배후에 있다고 확신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 이후 포프모빌에도 방탄을 입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27년간 세계를 순방하며 여러 포프모빌을 경험했다. 1981년 저격 사건 이후 퍼레이드용 포프모빌에도 방탄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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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미국을 방문했을 땐 '지프'가 포프모빌을 제공했다


방문국의 브랜드가 포프모빌을 제공했다. 브랜드가 없는 국가에서는 현지 공장을 가진 브랜드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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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3월 19일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SNS에 등장한 최초의 교황이다. 계정을 만든 지 12시간도 되지 않아 팔로워 100만 명을 돌파했다. 최단기간 팔로워 기록이다

 
2013년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탄 포프모빌을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교황은 경호 문제에 개의치 않았다. "내 나이쯤 되면 잃을 것도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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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방한 당시 이용했던 포프모빌


2014년 8월 방한 당시 세 종류의 포프모빌을 탔다. 현대 싼타페와 기아 카니발은 퍼레이드용, 2세대 쏘울 2대는 의전용이었다. 교황은 방한 전부터 "가장 작은 급의 한국 차를 타고 싶다"고 했다. 이 싼타페와 카니발, 쏘울은 이후 바티칸으로 공수돼 교황청에서 사용하고 있다.


 


사진 : 나무위키, 위키미디어커먼즈, 위키피디아, Getty Images, National Army Museum, The Tank Museum, www.nps.gov, www.museivaticani.va.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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