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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고르바초프, 정치의 패자 역사의 승자

등록 2022.08.31 08:35

수정 2022.09.02 16:21

[데스크 칼럼] 고르바초프, 정치의 패자 역사의 승자

/AP 연합뉴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사망했다. 향년 91세.

냉전이 절정이던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당이 돼 권력을 잡았다. 권력서열이 한참 밀렸지만, 브레즈네프 사망 이후 취임한 공산당 서기당이 잇달아 노환으로 숨지면서 당시 54세였던 젊은 고르바초프가 집권할 수 있었다. 소련 공산당의 다른 간부와 달리 술을 멀리 하고 성실하게 일만 하던 고르바초프에게 권력은 마치 선물처럼 주어졌다.

농업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경제가 더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선물처럼 받은 권력으로 소련의 체제 변환을 시도했다. 국민들에게 먹을거리도 제공하지 못하면서 막대한 국방비 지출로 꾸역꾸역 체제를 지탱해봤자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 결과다. 고르바초프는 경제를 살리려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했고,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폐기했다. 이른바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였다. 1989년에는 동유럽의 민주화를 허용했고, 베를린 장벽 붕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미국의 조지 부시(아버지) 대통령과 몰타에서 정상회담을 열어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다음해인 1990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불과 1년 후인 1991년 전세계는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국내에서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8월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무력한 고르바초프 대신 보리스 옐친이 탱크 위에 올라 민심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쿠데타는 진압됐지만, 고르바초프는 의회에서 옐친의 지시에 따라 생전 처음 보는 문서를 낭독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실각한 후 199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득표율은 0.5%에 불과했다. 고르바초프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데스크 칼럼] 고르바초프, 정치의 패자 역사의 승자
/AP 연합뉴스


고르바초프가 소련 경제에 내린 진단과 해법은,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옳았다. 가뜩이나 허덕이던 소련의 공산주의 경제는 1980년대 들어 미국 레이건 정부가 군비 경쟁을 본격화하자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허약한 러시아를 버티는 힘은 군부와 공산당 조직 뿐이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은 바로 이 군부와 공산당 조직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이었다. 당연히 반발이 뒤따를 일이었지만, 고르바초프는 그저 찍어누르면 될 일 정도로 여겼다. 문제는 기득권의 반발은 그리 간단히 찍어누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특히 군 경력이 없고 공산당 지도부의 막내급이었던 고르바초프에게는 찍어누를 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내부 권력 투쟁에서 실패하면 민심을 얻어야 한다. 민심을 얻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거나, 배를 넉넉하게 채워줘야 한다. 고르바초프는 두 가지 모두에서 실패했다. 어설픈 시장경제 도입은 상상하지 못한 공급부족과 물가상승을 불렀다. 민생이 최악으로 치닫는데 지도자는 외국에서 잘난척하며 노벨평화상을 받고 다니는 모습은 국민들 가슴에 불을 지를만 했다. 고르바초프는 지금도 외국에서는 '냉전 종식의 주역'으로 박수를 받지만, 러시아 국내에서는 매국노 취급을 받는다.

고르바초프의 사례는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댓글부대의 눈치를 보는 정치인들의 마음도, 열성 지지층에 갇힌 정치에 왜 탈출구가 없는지도 이해하게 해준다. 고르바초프도 지지층만 바라보고, 댓글부대의 눈치를 봤더라면 훨씬 더 오래 집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지금도 미국과 소련이 언제 서로를 향해 핵무기를 쏠지 모른다는, 우주에서 핵전쟁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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