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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 일기] 팀 잉골드 '라인스'

등록 2024.03.18 14:55

수정 2024.03.19 15:26

[한 문장 일기] 팀 잉골드 '라인스'

/포도밭출판사 제공(예스24 캡처)

 
"행로의 선이 장소에서 장소로 따라가는 곳을 파편화된 탈근대적인 선은 가로질러 간다. 한 목적지에서 다른 목적지로, 단계적으로 가는 것도 아니라 하나의 균열점에서 다른 균열점으로 가로질러 간다. (…) 행로의 선은 거주의 실천과 그것이 수반하는 우회적인 움직임을 통해 성취되는 것으로 장소적(topian)이다. 반면에 진보적인 전진이라는 거대 서사에 의해 추동된 근대성의 직선은 무장소적(utopian)이며, 탈근대성의 파편화된 선은 탈장소적(distopian)이다."

- '선이 직선이 되는 법'

손으로 선을 그어 보자. 반듯하게 그리려고 노력해도 선은 당신의 계획을 벗어나 이리저리로 움직일 것이다. 삐뚤빼뚤 엇나가고 어느 지점에서는 뾰족한 흔적을 남길지도 모른다. 애초에 생각해 두었던 목적지에는 도달할 수도 있고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이쪽에서 저쪽까지 가는 동안 당신은 당신이 내는 길을 보고, 새로운 풍경을 만날 것이다. 선을 그리는 동안 당신은 그 시간을 살며 시간과 상호작용할 테니까.

반면 자를 들고 그린다면 어떨까? 시행착오나 궤도 이탈 같은 것은 잘 없다. "직선이 두 점에 맞닿을 수 있도록 자를 정렬하면 그려지기도 전에 펜이나 연필 촉의 궤적이 이미 완전히" 정해지기 때문에. 직선은 "근대성의 가상적인 도상, 즉 자연 세계의 우여곡절에 대한 이성적이고 목적 의식이 있는 설계의 승리를 나타내는 지표"다.

영국의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2007년 출간한 그의 대표작 '라인스'에서 선 인류학을 전개한다. 잉골드에게 세계는 흐르고, 변화하며, '만들어 나가는' 어떤 것이다. 그는 사람과 사물 역시 고립된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레이엄 하먼으로 대표되는 객체지향 철학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객체지향 철학은 사물을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들 사이의 단절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잉골드에 따르면 모든 생명은 선을 따라 나아간다. 그는 우리의 삶이란 길을 따라 사는 것이며, 이때 길은 일종의 선이라고 이야기한다. 노래와 말, 뜨개질과 그림, 글과 여행도 모두 마찬가지다.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나아가며 이어진다.

책의 초반부를 읽으며 몇 년 전 작은 규모의 낭독 모임을 꾸린 일이 떠올랐다. 한 권의 책을 정한 후 모임원들이 돌아가며 소리 내 한 문단씩을 읽는 모임이었는데, 2시간을 내리 읽어도 책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리는 직선의 이동을, 목적지까지 단숨에 나아가는 '운송'을 원했으므로(손에 남는 성취를 바랐다.) 모임은 얼마 가지 못하고 해체됐다.

그러나 작은 세미나실을 채우던 웃음소리, 동료의 목소리로 책이 내게 오기 전에 눈으로 먼저 글자를 훑지 않으려 노력했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누군가가 호명한 문자가 귀에 와닿을 때 느껴지던 생경한 감각까지도. 그때 낱말들은 물화되고 고정된 책 속의 어떤 것이라기보다 흐르고 있는 시간에 가까웠다. 그 시절의 낯선 읽기 경험이 '라인스'의 1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좋은 책은 풍경을 바꾼다. 문자와 문자, 행과 행 사이를 천천히 거닐 때 독자의 세계에는 바람이 불고, 새로운 공기가 흐른다. 우리는 두근거림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몸을 밀고 앞으로 나아간다. "선들은 정말로 거기에, 우리 안에, 우리 주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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